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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역사이야기 전라남도 누리집

[전남역사이야기] 남도의병 4 -명량대첩

by 바람재이야기 2024. 6. 15.

 

 

 

 

조선수군을 재건한 이순신 장군과 보성 그리고 명량대첩

 

 

 

조선 수군 재건로

 

이순신은 84일 압록강원(곡성군 죽곡면 압록리), 85일 옥과현(옥과면), 87일 곡성 강정마을(석곡면 유향리)에 머물며 어떻게든 군사들을 모으려 하고 있었다. 그러나 군사들은 겁을 먹고 도망가느라 바빴다. 무기 역시 구하기가 힘들었다. 87일 도망치는 군사들에게서 말 3마리와 활화살 약간을 징발한 것이 전부였다.

 

8일 새벽 곡성을 떠난 이순신은 아침에 부유창(순천시 주암면 창촌리)에 도착했다. 하지만 창고는 불타버리고 재만 남아있었다. 전라병사 이복남이 적에게 식량이 넘어가는 것을 우려해 모두 불태워 버렸기 때문이었다. 부유창 근처에 있던 고을 수령들은 통제사 이순신이 왔다는 소식에 문책을 받을까봐 도망가기에 급급했다.

 

8일 오후에 순천에 도착했다. 순천부 관청에는 곡식과 무기 등이 약간 남아있었다. 군사들이 서둘러 도망가느라 미처 불태우지 못한 것이었다. 이순신은 총통과 같이 무거운 화포는 땅속 깊이 묻어 숨기고 다른 무기들은 군사들이 짊어지도록 했다. 9일 이순신은 낙안(순천시 낙안읍)에 도착했다.

 

길에는 깊은 산속으로 피난 가는 백성들이 즐비했다. 백성들은 이순신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그리고 이제 사또께서 오셨으니 우리는 살게 되었다고 좋아했다. 이순신은 말에서 내려 백성들의 손을 부여잡으면서 몸조심하라고 당부했다. 노인들은 술병을 바치며 고마움을 표했다. 이순신이 받지 않자 울면서 사정했다. 이순신에 대한 믿음과 사랑, 그리고 이순신의 백성사랑을 느낄 수 있는 장면이다.

 

이순신, 보성에서 조선수군 재건발판을 마련하다

 

1955년 보성읍전경

 

 

89일 저녁에 이순신은 보성 조양창에 도착했다. 이순신의 조카 이분이 쓴 <이순신 행록>에는 이때 이순신을 따르는 군사가 120명에 달한 것으로 나와 있다. 보성 도착시 병사의 수와 관련된 기록은 다음과 같다.

‘83일 진주에서 출발할 때 군관 9명과 병졸 6명 등 모두 15명밖에 되지 않던 군사가 순천에서는 60명이 됐고 보성에 이르렀을 때는 120명에 달했다

 

고내마을 조양창이 있던 자리 .  마을주민이 보성문화관광해설사 김용국씨 ( 우 ) 에게 조양창이 있던 자리를 안내하고 있다 .

 

보성에 도착한 이순신은 향촌 사림들에게 전령을 보내 식량을 지원해줄 것을 호소했다. 많은 이들이 식량을 보내겠다고 알려왔다. 그래서 이곳의 지명이 식량을 얻게 됐다는 뜻의 득량’(得糧)이 됐다. 그런데 고내(庫內)마을 조양창(兆陽倉)에 곡식이 남아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고내마을은 조성면 서쪽에 있는 마을이다. 지금은 행정구역상 조성면 우천리다. 조양창은 예전에 주월산과 방장산 일대에 자리했던 조양현성의 식량창고였다.

 

이순신은 서둘러 조양창을 찾아갔다. 봉인된 창고에는 600(1200가마)의 군량이 보관돼 있었다. 이순신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600석은 장정 600명이 1년 동안 먹을 식량이다. 가장 기본적인 것이 해결된 것이다. 이순신은 이 군량을 조양포로 옮긴 뒤 다시 조선수군 재건의 근거지로 삼을 군영구미(軍營仇未)로 보내기로 했다. 군영구미는 1457(세종 3)에 개설된 수군만호진이다.

 

그러나 군사가 없어 옮길 일이 걱정이었다. 이때 팔을 걷어붙인 보성백성들이 이순신에게 몰려들었다. 보성백성들은 수레를 끌고 오거나 지게를 지고 와서 조양창에서 조양포까지 쌀을 실어 날랐다. 어민들은 배를 가져왔다. 10여 척의 어선들이 순식간에 포구에 배를 댔다. 이순신을 따라온 군졸과 어민들은 힘을 합쳐 이날 하룻 만에 군량수송 작전을 성공적으로 끝냈다. 보성군민들의 적극적인 도움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순신과 조선을 지켜낸 최대성과 보성의병

보성군 고지도 (1872)

 

이순신의 조선수군 재건에는 보성군민들의 피와 땀이 배어있다. 이순신이 명량대첩에서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것은 보성군민의 헌신에 힘입어 조선수군을 재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순신의 처가와 외가 사람들은 물론이고 보성군민들은 이순신을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했다. 보성은 대대로 의향이었다. 임진·정유재란뿐만 아니라 정묘호란과 구한말 일제 침략 당시에도 수많은 보성의 인물들이 나라와 민족을 위해 목숨을 바쳤다.

박정중 보성군문화관광해설사가 방진관 담벼락에 전시된 이순신장군의 조선수군재건관련 사진을 설명하고 있다 .

 

방진관 내에 전시돼 있는 선무원종공신녹권

 

방진관 전시관 내부 모습

 

 

의향보성은 보성군민들의 핏속에 면면히 흐르고 있는 조상들의 뜨거운 나라사랑과 애족정신에서 비롯된 것이다. 보성군청 뒤에는 방진관이 있다. 예전에는 군수 관사였는데 이순신유적복원사업의 하나로 리모델링한 뒤 20163월 이순신교육관으로 개관됐다. 보성군수를 지낸 이순신장군의 장인 방진과 부인 방씨의 일화 등이 잘 전시돼 있다. 이순신은 과거에 급제할 때까지 보성에서 11년 동안을 지낸 것으로 알려졌다.

 

이순신 장군은 보성읍성에 들어오기전 박곡마을 양산항의 집에 머물면서 조선수군재건을 지휘했다 .  양산항의 집앞에 세워진 오매정 .

 

이순신은 811일부터 14일까지 보성 박곡마을에 머물면서 군사와 배를 모았다. 양산항의 집에 임시로 조선수군통제영을 설치하고 조선수군 재건의 본부로 삼았다. 선조와 영의정 유성룡 등에게 7통의 장계를 올리는 한편 경상우수사 배설에게 전령을 보내 군영구미로 전선과 함께 들어올 것을 명했다. 양산항은 조선 명종 때 영해(영덕)도호부사를 지낸 인물로 참봉 양응덕의 아들이자 양팽손의 손자다.

 

이순신이 박곡마을에 머물면서 조선수군 재건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최대성과 보성의병들이 후방을 지켜주었기 때문이다. 최대성은 고려 말 대학자 최해의 8대손이다. 임진왜란 초기 이순신의 한후장이었던 최대성은 옥포해전에서 일본수군 전선 1척을 격파시켰다. 최대성은 조선수군의 해상작전에 적극적으로 동참했으나 나중에는 의병들을 모아 보성 일대에서 일본군과 맞서 싸웠다.

 

최대성 장군 영정
최대성 장군 충절비와 장군상

 

최대성은 이순신의 <난중일기>에 수차례 등장하는 인물이다. 최대성은 정유재란 당시 이순신을 도와 후방에서 조선수군을 지키고 병참활동을 지원했다. 이순신은 모의장(募義將) 최대성과 송희립에게 일본군에 대한 정보수집과 함께 자신을 추격해오는 일본군을 막아낼 것을 지시했다. 최대성은 1천여 명의 보성의병과 함께 이 임무를 잘 수행했다. 15983월까지 20여 차례의 크고 작은 전투에서 일본군에 타격을 입혔다.

 

최대성은 이순신이 노량해전에서 전사한 15979월 이후에도 보성으로 들어온 일본군을 상대로 전투를 치렀다. 159868일 군두혈전에서 안치고개에 매복하고 있던 일본군의 총탄에 맞아 숨졌다. 이 군두혈전에서 최대성과 그의 아들 언립·후립, 아우 최대민, 종제 최 대형 등이 장렬히 전사했다. 이외에도 형제노비였던 두리동과 갑술을 비롯 수많은 보성의병들이 이 전투에서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쳤다.

 

비장한 장계를 올린 보성 열선루

1739~1750 년 비변사인방안 안에 그려져 있는 열선루 .  중앙 좌측에 열선정이라는 누정이름이 보인다 .

 

8 14일 이순신은 보성관아에 도착했다. 밤에 큰비가 내렸다. 이순신은 보성읍성 열선루(列仙樓)에 머물렀다. 열선루는 15세기 초 출성된 보성읍성 객관(客館) 북쪽에 있던 누정이었다. 원래는 취음정(翠蔭亭)이 있었는데 보성군수 신경이 누각을 다시 짓고 열선정이라 이름 지었다. 정유재란 당시 왜적이 보성을 분탕질할 때 불태워져 버렸다. 뒤에 보성군수 이직이 중건했다.

 

보성군청 앞에 전시돼 있었던 열선루 주춧돌 .  복원중인 열선루 주춧돌로 사용됐다 .
열선루와 보성읍성터 자리 전경 .  열선루가 있던 자리에는 제칠일안식일 예수재림교회와 보성초등학교가 들어서있다 .

 

 

열선루가 있던 자리에는 제칠일안식일 예수재림교회가 들어서있다. 이 교회는 보성초등학교 와 맞붙어 있는데 몇 해 전 보성군청 신축공사와 도로공사 때 주춧돌과 외벌대(댓돌)들이 발견됐다. 이 주춧돌들은 보성군청 광장에 전시돼 있다가 열선루 복원공사 때 다시 건물의 주춧돌로 사용됐다.

 

815일 이순신은 보성 열선루에서 선전관 박천봉이 가져온 선조의 유지(有旨·편지)를 받았다. 유지내용은 약세인 조선수군을 폐하고 육군에 의탁하여 싸우라는 것이었다. 참으로 기가 막힌 일이었다. 불과 보름 전에 수군을 재건해 싸우라 해놓고 이제와서는 수군을 없애고 육군으로 싸우라니,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명령이었다. 이순신은 고민하고 고민했다. 조선수군을 없앨 수는 없었다.

 

<난중일기> 815일자에는 이순신의 편치 않은 마음이 그대로 나타나 있다.

 

‘8월 15일 비가 계속 내리다가 늦게 개었다. 식사 후 열선루에 나가 있었다. 선전관 박천봉이 유지를 가지고 왔다. 8월 7일에 작성된 것이었다. 영의정(유성룡)은 경기도 지방을 순찰중이라 했다. 곧 받았다는 장계를 작성했다. 보성의 군기를 점검한 뒤 네 마리 말 위에 나눠 실었다. 저녁에 밝은 달이 수루를 비추는 것을 보았으나 마음이 매우 편하지 않았다’

 

<난중일기>에 등장하고 있는, 이순신이 선조에게 올린 장계가 바로 그 유명한 금신전선 상유십이’(今臣戰船 尙有十二)장계다. 장계 내용은 승지 최우해가 지은 <충무공 이순신 행장>에 나와있다.

 

‘임진년으로부터 5~6년간 왜적이 감히 호남과 충청에 침입하지 못한 것은 조선수군이 왜군의 진격로를 막았기 때문입니다. 지금 만일 수군을 없앤다면 이것이야말로 적에게 이로운 일입니다. 왜적은 호남과 충청 연해를 거쳐 곧바로 한강까지 도달할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신이 두려워하는 바입니다.
지금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전선이 남아있습니다.(今臣戰船尙有十二) 죽을힘을 다해 막아 싸운다면 능히 대적할 방책이 있습니다. (則猶可爲也) 전선이 비록 적지만(戰船雖寡) 미천한 신하가 죽지 아니했으니(微臣不死)왜적이 감히우리를 가벼이 업신여기지 못할 것이옵니다.(則賊不敢侮我矣)’

 

 

이날 이순신은 많은 술을 마시고도 잠을 이루지 못했다. 임금과 조정 대신이 수군을 그리 업수 여기니 원통한 마음이 깊었다. 어떻게든 조선수군을 재건하기 위해 군관들과 함께 죽을 힘을 다하고 있는데 수군을 없애라고 하니, 통곡만 터져 나왔다. 추석을 맞아 보름달은 휘영청 한데 시름은 깊었다. 그래서 일부 학자들은 이순신이 한산도가(閑山島歌)의 한()을 한()으로 바꿔 이날 열선루에서 읊었을지도 모른다고 주장하고 있다. 비장한 마음과 원통한 마음을 한산도가(寒山島歌)로 풀어냈다는 것이다.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홀로 앉아(寒山島月明夜 上戍樓)

큰 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하던 차에(撫大刀深愁時)

어디서 들려오는 피리소리는 이내 몸의 애를 끊나니(何處一聲羌笛更添愁)’

 

 

선조는 이순신의 장계에 대해 아무런 답을 내리지 않았다. 이순신이 갖고 있는 배는 12척에 불과했으나 왜군은 부산 본영에만 600척의 전선이 있었다. 선조는 이순신의 지략이 제아무리 뛰어나도 12척의 배로 일본수군을 당해낼 수 없다고 판단한 듯싶다. 조선수군을 폐지하지 않아도 일본수군에 의해 전폐당할 신세이니, 굳이 수군을 폐지하라고 다그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상유십이공원

보성읍성 및 이순신 상유십이 공원

 

이순신의 출정

보성군 회천면 전일 2 리 군학마을의 군영구미

 

817일 이순신과 120명의 군사들은 보성 관아를 떠나 봇재를 넘어 회천면 벽교리전일리 일대 백사정(白沙汀)에 도착했다. 백사정은 회령진성 포구 앞 바닷가에 자리하고 있는 군사기지였다. 이곳에서 이순신은 군사들의 군기를 점검한 뒤 점심을 먹었다. 그 다음 회령포성(會寧浦鎭)의 전진기지인 군영구미(軍營仇未)로 갔다. (학자에 따라 백사정과 군영구미의 위치에 대해서는 의견이 조금씩 다르다)

 

군영구미 해안가에 세워져 있는 이순신장군 동상

 

 

 

군영구미는 지금의 회천면 전일2리 군학마을에 자리하고 있던 수군기지였다. 1457(세종 3)수군만호진이 개설되면서 군영구미라 불렸다. <호남진지>의 회령포진지에 따르면 회령면 휘리포라 부른 기록이 있다. 배를 만드는 휘리, 군선이 정박했던 구미, 성곽이 있던 군학 등 3개 마을이 있었는데 이들을 모두 합쳐 구미영성(龜尾營城)’이라고도 했다.

 

818일 이순신은 회령포에서 경상우수사 배설로부터 전선을 인수받았다. 그리고 다음 날 삼도수군통제사 취임식을 가졌다. 12척의 전선과 120명의 장졸이 전부였으나 조선수군들의 사기는 높았다. 이날 이순신은 우리들이 다 같이 임금의 명을 받들었으니 의리상 같이 죽는 것이 마땅하다. 한 번 죽음으로써 나라에 보답하는 것이 무엇이 아까우랴. 오직 죽음이 있을 따름이다!” 라고 군사들을 독려했다. 이충무공의 뜨거운 충성심과 나라사랑에 절로 눈물이 나온다.

 

회령진에서 미약하나마 조선수군의 위용을 갖춘 이순신은 해남 이진(梨鎭:해남군 북평면 이진리)으로 진을 옮겼다. 그리고 어란포와 장도를 거쳐 829일 진도 벽파진에 진을 쳤다. 적은 수의 전선으로 넓은 바다에서 싸우면 전멸당할 우려가 컸기 때문이다. 이순신 장군은 벽파진 바다도 조선 수군에 불리하다고 판단해 915일 우수영으로 진을 옮겼다.

 

#필사즉생필생즉사

필사즉생 필생즉사

 

이순신 장군은 수하 장졸들에게 必死則生, 必生則死(필사즉생 필생즉사)’의 정신으로 싸워줄 것을 당부했다. 마침내 916일 이른 아침, 일본 수군이 명량(울돌목)으로 진입했다. 일본 수군의 전선은 133척이었다. 당시 울돌목의 조류는 거의 멈춰선 상태(停潮時期)였다. 이순신장군은 일자진(一字陣)을 형성해 일본 수군의 명량통과를 저지했다. 일본 수군은 이순신장군이 타고 있던 판옥선을 포위해 공격하려 했다.

 

#울돌목

울돌목전경 ( 전남도 제공 )

 

 

이때 이순신장군은 뒤에 배치돼 있던 거제현령 안위와 중군(中軍) 김응함 등이 타고 있던 전선을 적진으로 돌진케 했다. 때마침 조류가 급하게 흐르기 시작했다. 좁은 수로에서 물살이 급하게 흐르자 일본 전선의 대형이 무너졌다. 전투 중에 조선수군이 일본의 수군장수 구루시마(來島通總)의 목을 베어 높이 매달자 일본수군의 사기가 떨어졌다. 조선수군이 대포(玄字銃筒)를 쏘며 맹렬히 공격하자 일본수군은 도망을 가기에 바빴다.

 

이날 해전에서 31척의 일본수군 전선이 격파됐다. 바다 물길을 적절히 이용한 전략으로 13척으로 133척의 전선을 물리친 것이다. 명량해전은 세계해전사상 유례없는 대승이었다. 명량해전의 승리로 조선수군은 서해바닷길을 지킬 수 있었다. 만약 명량해전에서 조선수군이 패배했더라면 왜군은 서해와 한강, 대동강, 압록강을 이용해 군사를 조선 내륙 깊은 곳까지 실어 나르며 조선 전역을 유린했을 것이다.

 

명량대첩은 이순신 장군의 지략과 전라도 바다사나이들의 용맹스러움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승리였다. 이순신장군은 열악한 상황을 불굴의 의지로 극복했다. 군율을 엄히 해 조선수군을 강한 부대로 만들었다. 전라도 사람들과 수군들은 나라를 구해야한다는 일념으로 전쟁터에 나가 목숨을 바치고 희생했다. 명량대첩은 용맹한 이순신장군과 의로운 전라도인의 투혼 때문에 가능했던 전투였다.

 

이순신장군은 159791613척의 전선으로 133척의 일본수군과 울돌목에서 맞붙었다. 그리고 대승을 거두었다. 명량대첩을 통해 조선은 다시 살아났다. 명량대첩 승리는 이순신의 지략과 보성군민을 비롯한 남도 땅 백성들의 희생과 헌신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이순신의 조선수군 재건은 세계 해전 사에서 가장 드라마틱한 해전인 명량대첩을 이뤄냈다.

 

명량해전 이후 왜군의 조선양민 학살과 노량해전에서의 이순신장군 순절

 

명량에서 참패한 왜군은 그 분풀이를 전라도 사람들에게 안겼다. 명량해전 후 이순신 장군은 전선을 이끌고 고하도 쪽으로 이동했다. 해남우수영에 상륙한 일본 수군들은 조선인 백성들을 보면 누구든 잡아 죽였다. 명량해전 이후 전투는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울산성 전투와 같은 대규모 전투가 있기는 했지만 대부분 소규모 전투였다.

 

#광양만해전

이은철 광양지역사연구회 마로희양 대표가 광양 구봉산전망대에서 정유재란 당시순천왜성과 광양만 일대에서 조명연합군과 왜군들 사이에 벌어졌던 육해상 전투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저 멀리 보이는 우측 산 부근의 바다가 노량해전이 벌어졌던 관음포 해상이다.

 

1598818일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했다. 덕천가강(德川家康)5대로(大老)는 조선에서의 철병을 결정했다. 고니시 유키나가는 유정과 진린에게 뇌물을 바치고 퇴로를 열어줄 것을 간청했다. 유정과 달리 진린은 이순신장군과 힘을 합쳐 왜교성 공격에 전력을 다하고 왜 수군과의 전투에서도 용맹하게 싸웠다. 하지만 고니시의 부탁대로 왜의 통신선 1척을 빠져나가게 해주었다. 한편 11월 중순, 사천(泗川)과 고성·남해 일대의 왜군은 철병을 결정하고 순천 왜성의 고니시 유키나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연락이 없어 궁금하던 차에 마침 조명연합 수군의 감시망을 뚫고 고니시 유키나가가 보낸 통신선이 도착했다.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등 사천·고성·남해에 주둔하고 있던 왜장들은 고니시 부대 구출에 나섰다. 500여 척의 전선에 나눠 타고 순천 왜성으로 향했다. 조명연합 수군을 지휘하던 이순신과 진린은 무수한 적들이 순천왜성 앞바다로 진격해온다는 첩보를 듣고 470척의 전선을 이끌고 노량 앞바다로 향했다.

 

이순신 장군은 이 원수만 무찌른다면 죽어도 한이 없습니다’(此讎若除死則無憾)라고 하늘에 빌고 전투에 나섰다. 19일 새벽에 시작된 노량해전은 조명연합 수군의 대승으로 끝났다. 그렇지만 관음포(觀音浦)로 도주하는 왜선을 추격하던 이순신장군이 왜병이 쏜 총탄에 맞아 숨을 거두고 말았다. 이순신 장군은 최후의 순간까지 싸움이 급하니 내가 죽었다는 말을 하지 말라’(戰方急愼勿言我死)며 조선수군의 승리를 독려했다.

 

왜성에 갇혀있던 고니시 유키나가는 20일 아침 광양 앞바다에 조명연합 수군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600여 척의 크고 작은 배로 철수를 시작했다. 왜성 왜군은 여수해협 동쪽과 남해도 남쪽을 거쳐 거제도로 퇴각해 일본으로 철병했다. 이로써 임진왜란 7년 전쟁이 끝난 것이다. 순천왜성 전투와 광양만(노량)해전은 임진왜란 최후의 육해상 전투였다. 또한 민족의 별, 성웅 이순신 장군과 수많은 조선의 수군·의병들이 목숨을 잃은 혈전이기도 했다.

 

한편 순천왜성 전투와 광양만해전은 조선과 일본, 명나라가 사활을 걸고 최후의 일전을 벌인 국제적 전투였다. 명의 군사 중에는 중국이 전통적으로 오랑캐라고 불렀던 변방의 군사들이 대거 포함돼 있었다. 신출귀몰해 귀병(鬼兵)이라고 불리던 묘족(苗族)과 섬라(暹羅·태국), 도만(都蠻·티베트), 능국(楞國·스리랑카), 면국(緬國·미얀마) 등의 병사들이 일본군과 싸웠다. 병사들의 출신만 놓고 보면 정유재란은 동북아시아는 물론 동남아시아 각국의 병사들이 목숨을 걸고 맞붙었던 아시아 초유의 국제 전쟁이었다.

 

순천왜성 전투와 광양만 해전

#순천정유재란역사공원

전남 순천시 해룡면 쟁골길  2 에 들어선 순천정유재란 역사체험학습장 .  폐교된 초등학교 건물과 대지를 매입해 역사체험학습장으로 조성했다 .  평화군상과 평화의 판석 ,  스토리 월이 설치돼 있다 .  건물 내에는 임진 · 정유재란의 성격과 순천왜성 · 광양만 해전의 성격 · 경과를 잘 설명해주는 안내문과 영상들이 전시돼 있다 .

 

 

순천왜성(順天倭城) 부근에 순천정유재란 역사체험학습장이 세워져 20245월 말 개관됐다. 이 역사학습장은 전남 순천시 해룡면 쟁골길 2(신성리 482)에 자리하고 있다. 순천왜성에서 1.3Km 떨어진 곳이다. 이 역사체험학습장은 정유재란 당시인 1598919일부터 1120일까지 순천왜성과 광양만 등 육지와 바다에서 60일 동안 격렬하게 벌어진 조명연합군과 일본군 사이의 전투역사를 기록한 공간이다.

 

이 역사체험장은 정유재란의 참혹한 역사를 기억하면서 평화의 소중함을 되새기자는 의미로 만들어졌다. 순천왜성 일대 육지와 광양만 바다는 정유재란 최대의 격전지였다. 순천왜성에 고립돼 있는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왜군을 섬멸하기 위해 이순신을 주축으로 한 조명연합 수군은 사력을 다해 공격했다. 그렇지만 명나라 서로군 총사령관인 유정은 소극적인 태도로 일관했다. 강화협상을 통해 왜군의 자진철수를 유도하는 쪽으로 국면을 끌고 갔다.

 

이순신은 왜군에게서 뇌물을 받고 퇴로를 열어주려는 명군의 처사에 반발해 왜군섬멸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사천 일대 일본 수군들이 순천왜성 왜군들을 구출하기 위해 광양만 초입인 관음포로 진입하다가 벌어진 전투가 노량전투다. 당연히 노량해전은 순천왜성 공방전과 광양만해전 연장선상에서 벌어진 전투다. 노량해전은 순천왜성 전투의 마지막 전투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노량해전을 순천왜성 전투와 광양만해전의 연장선상에서 이해하는 이가 드물다.

 

순천왜성 역사체험학습장은 순천왜성·광양만해전의 올바른 이해와 역사적 교훈을 명확하게 하기 위해 세워졌다. 각종 영상과 기록을 통해 정유재란의 참혹함을 사실대로 적시해 평화의 소중함을 강조하고 있다. 순천왜성은 전쟁의 참화와 평화의 중요성을 증명하는 역사적 의미를 지닌 중요한 장소이자 역사적 공간이다. 뒤늦게나마 순천왜성 인근에 정유재란의 비극과 교훈을 되새겨주는 역사체험학습장이 생긴 것은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다.

 

왜교성 일대 전투는 나라가 국방을 소홀히할 때 벌어지는 참극에 대한 역사적 교훈을 보여주고 있다. 일본군이 순천지역에 주둔해 있을 때 이 일대 백성들은 성을 쌓고 농사를 지어 군량미를 대느라 고역에 시달렸다. 조선군사의 지휘권이 명나라에 귀속됨에 따라 조선군사들은 일본군을 응징할 수 있는 기회가 왔을 때도 전투를 벌일 수 없었다. 나라의 지도자들이 안일하고 무능할 때 백성들이 얼마나 모진 고통과 희생을 당하는지를 보여주는 곳이다.

 

현재 전남지역에 남아있는 임진·정유재란 전투현장으로서는 순천왜성과 인근의 장도(獐島:노루섬) 와 묘도(猫島)가 유일하다. 그런데 순천왜성은 그 축성의 주체가 일본군이라는 이유로 역사적 가치가 폄훼되고 있다. 1963121일 사적 제49호로 지정됐으나 일제지정문화재 재평가를 통한 등급 조정으로 199711일자로 사적 지정이 해제됐다. 그리고 1999226일 전라남도 기념물 제171호로 재지정됐다.

 

순천왜성 앞 바다에 있던 장도역시 순천왜성 전투와 광양만해전의 중요한 장소였다. 장도는 광양앞바다를 감시하는 왜 수군의 전초기지였다. 그런데 조명연합군 수군은 순천왜성 전투가 시작된 1597920일 장도를 공격해 장악하고 군량과 마필을 탈취했다. 그리고 조선인 포로 300여명을 데려왔다. 그렇지만 장도는 율촌지방산업단지 조성과정에서 채석장으로 사용돼 섬 반쪽이 깎여버렸다. 바다 일대가 매립되면서 지금은 육지 속의 작은 동산으로 변한 상태다. 묘도 쪽 바다도 광양제철이 들어서면서 상당부분 매립돼 풍경이 달라졌다.

 

당시의 전투현장을 헤아려볼 수 있는 곳이 바로 순천왜성 역사체험학습장이다. 역사체험장 앞 광장에는 평화군상이 있다. 정유재란 최후의 격전지 순천에서 고난을 겪은 민초들의 모습이 형상화돼 있다. 광장에는 평화의 판석이 깔려 있다. 정유재란이 주는 교훈을 1,597개의 바닥돌에 각인시켰다. 스토리 월(Story Wall)에는 전쟁의 경과와 왜성축조의 목적, 15989월부터 11월까지 3개월간 치러진 순천왜성의 전투일지, 명나라 종군화가가 그린 정왜기공도권(征倭紀功圖卷)을 통해 살펴본 왜교성전투 해설 등이 담겨 있다.

 

 

순천왜성(順天倭城)

#순천왜성

순천왜성 전경 ( 순천시 제공 )

 

순천왜성은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이끄는 왜군이 조선백성들을 동원해 축성했다. ()은 튼튼하게 지어졌다. 성은 3면이 바다에 둘러져 있다. 서쪽 성만이 육지로 이어지는 곳에 세워졌다. 성곽은 다섯 겹으로 만들어졌다. 외성(外城)과 내성(內城) 사이에는 바닷물을 끌어들여 해자(垓字)를 만들었다. 해자에 다리를 놓아 필요할 때만 사용했다. 멀리서 보면 성과 육지가 다리로 연결해 놓은 모습이어서 왜교성(倭橋城)’으로도 불렸다. 예성(曳城)이라고도 한다.

 

순천왜성은 전남지역에 남아있는 유일한 왜성이다. 1597년 음력 12월에 세워졌다. 면적은 188,000m²(6만여 평)이다. 외성 길이는 2,502m에 달했다. 규모가 튼튼하고 방어시설도 치밀해 난공불락의 성으로 지어졌다. 성 중앙 가장 높은 곳에는 고니시 유키나가 등 왜장들이 정세를 살피며 전투를 지휘했던 천수각(天守閣)이라는 건물이 있었다. 성안에는 15,000여 명의 왜병이 주둔했다. 성 동쪽으로는 방어시설과 함께 선착장이 마련됐다. 수백 여척의 일본 전선이 출입하면서 군사와 물자를 실어 날랐다.

 

장여동 순천시 문화재활용팀장이 순천왜성 지휘부 건물이었던 천수각 기단 앞에서 정유재란 당시 순천왜성 일대에서 벌어진 전투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  현재 순천왜성은 내성의 경우 출입문이 있었던 문지주변 성벽이 그런대로 남아있으나 해자 너머의 외성은 성벽 자체가 없어져버렸다 .  정유재란 이후 백성들이 성을 헐어 그 돌로 건물을 짓거나 공사를 할 때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

 

 

 

정왜기공도권(征倭紀功圖卷)

#정왜기공도권

정왜기공도권에 그려져 있는 조명연합군 순천왜성 육해상공격상황도 .  이 그림은 원본을 본뜬 사본에 일본인 전문가가 색을 입힌 것이다 .  정유재란 당시 순천왜성 주변의 전투상황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

 

 

15989월부터 11월까지 순천왜성과 왜성 앞바다에서 벌어진 전투는 장기간에 걸쳐 벌어진 매우 치열한 전투였다. 조선과 일본, 명나라 3국의 7만여 명에 달하는 육군과 수군이 생사를 걸고 싸운 공방전이었다. 순천왜성을 함락시키려는 조명연합군의 수륙 양면 공격과 이를 막아내려는 왜군의 분전은 대단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426년 전에 벌어진 일이라 전투장면은 상상만으로 가능한 일이다.

 

그렇지만 그 상상의 나래에 현실감을 부여할 수 있는 대단한 그림이 자리하고 있다. 그것은 명나라 황실의 임진왜란 종군화가가 그린 <정왜기공도권>(征倭紀功圖卷)을 찍은 사진이다. 이 사진은 콜럼비아 대학의 게리 레드야드(Gari K. Ledyard) 교수를 통해서 1978년 공개됐다. 조원래 순천대학교 명예교수는 <참전기록을 통해본 왜교성 전투의 실상>이라는 논문을 통해 <정왜기공도권>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정왜기공도권중 해상전투장면 ( 소장 스웨덴극동아시아박물관 ,  출처 국립진주박물관  1597 정유재란 전시도록 )

 

‘<정왜기공도권>은 가로 650Cm, 세로 30Cm의 채색화로서 오른쪽으로부터 왼쪽으로 그려진 두루마리이며, 시간상의 순서에 따라 공간의 변화가 계속된 그림이었다는 것이 레드야드 교수의 분석이다. 그림 전체에 등장하는 사람은 약 4천400명인데, 그 가운데 일본군이 약 2천70명(840명은 시체이거나 물에 빠진 사람)이며 2천330명 가량이 조·명연합군인데, 그 중 113명 정도가 조선군이고 대부분은 명군을 대상으로 그려졌다는 것이다.

여기에 나타난 선박은 모두 235척인데 그 가운데 136척이 조·명연합군의 것(약 9척 정도가 조선군 전선)이고 99척이 일본군의 선박이라고 한다.
이 두루마리의 전쟁기록화는 레드야드교수 자신이 소지한 것도 아니고, 직접 목격한 것도 아니었다. 1960년대에 이 그림의 감정평가를 맡았던 미국의 한 교수가 찍어둔 한 세트의 사진을 자신이 복사한 것이었다고 한다. 그림의 원소장자는 미국에 거주하고 있었던 중국태생의 미국시민이었는데, 그 뒤 중개상을 통하여 홍콩에 살고 있는 어떤 사람에게 그 그림을 매도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왜기공도권>에는 조선과 명나라의 장군들이 지휘관회의를 하는 장면부터 정유재란 최후의 전투인 노량해전 모습까지가 자세히 그려져 있다. 어떤 이는 <정왜기공도권>을 보고 종이위에 펼쳐진 무성영화를 보는 것 같다고 표현하기도 했다. 그만큼 장면 장면이 생생하고 사실적이라는 말이다. 조선과 명, 일본 군사들의 움직임과 무기, 탄약, 깃발, 전선, 군마 등이 사실적으로 그려 있어 마치 눈앞에서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느낌을 준다.

 

 

도움주신분들 : 이은철, 장여동, 김세곤, 노기욱, 정만진, 박정중, 박미숙, 서광준

사진제공 : 위직량, 류기영, 전남도보성군

 

 

순천정유재란역사공원(체험장)

 

 

순천왜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