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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역사이야기 전라남도 누리집/남도의병

[전남역사이야기]남도의병 8 - 김천일 의병장

by 바람재이야기 2024. 9. 3.

 

 

 

 

 

불꽃 처럼 살다 간 충절의 혼 건재 김천일 선생

 

나주 정렬사에 세워져 있는 김천일선생 동상

 

김천일 의병장은 1592년 임재왜란이 일어나자 나주에서 의병을 일으켜 영·호남과 경기지역에서 왜군과 싸우다 1593년 진주성전투에서 순절하신 분이다. 김천일선생은 진주성이 무너지자 아들 상건과 서로 끌어안고 촉석루에서 남강으로 몸을 던졌다

 

촉석루/ 진주시 홈페이지

 

 

김천일의병장은 선조 6(1573) 학행(學行)으로 발탁돼 군기시주부(軍器寺主簿)로 임명됐다. 뒤이어 용안 현감과 사헌부 지평으로 발탁됐으나 선조 11(1578)에 당대의 폐단에 대해 직언하는 바람에 임실 현감으로 좌천됐다. 이후 순창군수. 담양부사, 한성부서윤, 수원부사 등을 거쳤다.

 

나주 정렬사

 

정렬사 창의문

 

정렬사 유허비

 

 

김천일선생, 의병을 모아 출전하다

 

김천일 의병장 출전도 ( 出戰圖 ).  뒤쪽에 보이는 건물이 금성관의 정문인 망화루 ( 望華樓 ) 다 .

 

 

김천일, 의병부대를 이끌고 북상하다

 

김천일 선생은 외직을 맡다가 고향 나주에서 은거하던 중 임진왜란을 당했다. 그는 왜적의 발굽에 수도 한양이 밟히고 임금은 북쪽으로 피난을 갔다는 말에 비분강개했다. 선생은 체질이 허약해 전장에서 전투를 치를만한 인물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나라가 위기에 빠지자 손을 놓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2021 년  7 월의 망화루 모습 .  김천일 선생은  300 여명의 의병을 이끌고 금성관 망화루 앞에서 출전식을 가졌다 .

 

그래서 고경명(高敬命), 최경회(崔慶會), 박광옥(朴光玉) 등에게 의병을 일으키자는 서찰을 보냈다. 그리고 1592516일부터 나주에서 송제민(宋濟民양산숙(梁山璹박환(朴懽양산룡·임권·이광주·서정후 등과 함께 의병 300명을 모았다. 63일 김천일의병부대는 나주 금성관(錦城館)에서 출병식을 열었다.

 

#나주금성관

 

 

당시 전라도는 일본군의 침입이 없었다. 그러기에 임진왜란 초기 임금을 구한다는 근왕의병(勤王義兵)이 전라도에서 들불처럼 일어날 수 있었다. 의병은 의기는 충만했으나 지휘자나 군사나 모두 전투경험이 없는 학자나 농민들이었다는 점이 문제였다. 의병장들은 글 짓고 쓰는 데는 남달랐지만 병법에는 문외한이었다. 대부분의 의병장들은 평소 무술이나 운동을 하지 않아 자기 몸을 제대로 추스르기 힘든 허약체질이었다.

 

김천일 선생의 옛집터로 알려진 곳. 지금은 창평면사무소가 들어서 있다.

 

 

조선의병의 한계는 전투병이 대부분 농민들이었다는 것이다. 낫과 호미로 농사를 짓던 이들이 전투에 이골이 난 일본군들을 상대로 싸움을 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었다. 김천일의병부대도 이런 약점을 지니고 있었다. 김천일선생이 의병부대를 지휘해 한양으로 올라갈 때는 조선관군·의병들이 일본군에게 참패를 당해 전체적으로 사기가 떨어지고 분위기가 매우 어수선할 때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생은 죽음을 마다하지 않고 의병들을 이끌고 북상했다.

 

 

김천일, 진주성 싸움에서 순절하다

 

건재 김천일 선생 영정

 

 

628일 김천일의병부대는 수원에 도착해 독성산성(禿城山城)에 진을 쳤다. 김천일의병장은 수원부사를 지낸 적이 있어 이 일대의 지리에 밝았다. 7월 하순에 김천일의병장은 전라병사 최원(崔遠)의 관군과 함께 강화도로 진을 옮겼다. 이 무렵 김천일 의병군의 규모는 3천여 명에 달했다.

 

독성산성/오산시 홈페이지

 

 

1593410일 일본군이 한양에서 철수하자 김천일의병군은 추격에 나섰다, 김천일 의병군은 상주를 거쳐 함안에 이르렀다. 이 때 일본군은 진주성을 공격하기 위해 전열을 가다듬고 있었다. 경상도 밀양 부근과 동래·김해에 있던 일본군은 창원에 집결해 진주성 공격에 나섰다.

 

진주성/ 진주시 홈페이지

 

 

614일 김천일선생과 의병들은 진주성에 입성했다. 다른 조선관군과 의병들도 진주성으로 들어왔다. 김천일선생은 관군·의병의 주장인 도절제(都節制)가 돼 항전 태세를 갖췄다. 10만여 일본군은 621일부터 29일까지 대대적인 공격을 해왔다. 진주성을 지키던 조선관군과 의병들은 수적인 열세에도 불구하고 적의 공세를 잘 막아냈다.

 

그렇지만 계속되는 전투로 병사들의 수가 갈수록 줄어들고 장마비로 성벽 일부가 무너지면서 결국 진주성은 함락되고 말았다. 3만여 조선 관군과 의병, 그리고 진주성에 피난해 왔던 7만여 명의 백성들 대부분이 목숨을 잃었다.

 

촉석루 남강 / 진주시 홈페이지

 

진주성이 함락되자 김천일 선생은 아들 상건(金象乾)과 함께 촉석루에서 남강(南江)에 몸을 던졌다. 왜적의 칼에 몸을 상하게 할 수 없기에 스스로 목숨을 버렸다. 1603(선조 36) 좌찬성에, 1618(광해군 10)에 영의정으로 추증됐다.

 

김천일선생의 묘소
문열공 김천일 선생의 묘소 .  누군가가 선생의 뜻을 기려 조화를 두고 갔다 .  많은 이들이 찾아와 선생의 위국충절 정신을 이어갔으면 싶다 .

 

김천일선생 아들 상건의 묘소

 

 

김천일선생은 허약한 몸이었으나 국가가 왜적의 침입으로 존망의 위기에 놓이자 분연히 의병들을 모아 전투 한복판으로 뛰어들었다. 의병들 또한 나라를 지키기위해 김천일의병장을 따랐다. 그리고 경기·경상지역을 넘나들며 일본군과 혈전을 치렀다. 김천일의병장과 김천일의병부대 농민들은 죽을 곳임을 잘 알면서도 진주성에 들어가 일본군 10만 대군에 맞서 싸우다 끝내 순절했다.

 

정읍 남고서원. 이항과 의병장 김천일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한 서원/정읍시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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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움말
김희태 김세곤  정만진  양성숙  

사진제공
김희태 황호균 정선종 임애자 윤여정 양승문 손명심 주희춘 나주시 나주문화원 오산시 정읍시 진주시

 

 

 

 

                                         #촉석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