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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역사이야기 전라남도 누리집/남도의병

[전남역사이야기] 남도의병 6- 호남의 혼을 일으켜 나라를 구한 제봉 고경명

by 바람재이야기 2024. 8. 25.

 

 

 

호남의 혼을 일으켜 나라를 구한 제봉 고경명

고경명 의병장

 

159261일 담양에서 출병한 고경명과 유팽로 의병장 등 호남의병의 수는 6700여명에 달했다. 이는 당시 의병부대 중 단일부대로는 가장 큰 부대였다. 당초 고경명 의병군은 한양까지 진격할 계획이었다. 그런데 일본군이 금산을 넘어 전주를 공격하려 한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계획을 바꿔 금산으로 향했다. 전라도를 지키기 위해서였다.

 

159279, 고경명·유팽로 등 의병군은 전라도 방어사 곽영의 관군과 함께 금산성을 에워싸고 공격준비를 했다. 이때 일본군은 금산성문을 굳게 닫고 수비에 치중했다. 가끔 성문을 나와 조선관군을 공격하면서 약점을 살피고 돌아가고는 했다. 조선관군과 의병은 30명의 결사대를 보내 비격진천뢰 등으로 성벽을 폭파하려 했으나 여의치가 않았다.

 

이때 곽영은 전주성을 공격하던 일본군이 금산성으로 회군한다는 소식을 듣고 후퇴하자고 말했다. 그러나 고경명의병장은 공격을 주장했다. 수적으로 더 많은 부대를 거느린 고경명의병장의 뜻에 따라 조선관군과 의병들은 10일 새벽 다시 금산성 공격에 나섰다. 일본군은 성위에서 조총을 쏘며 방어에 치중했다.

 

그런데 갑자기 일본군이 성문을 열고 관군 진영으로 쳐들어왔다. 일본군은 수도 적고 전력도 약한 관군을 집중 공격해 의병군 진영을 무너뜨리는 전술을 사용한 것이다. 관군이 무너지자 의병들의 사기가 급속히 떨어졌다. 전열이 붕괴됐다. 이에 많

은 의병장들이 후퇴를 건의했으나 고경명은 패전장수로서 죽음이 있을 뿐이다며 물러서지를 않았다.

 

이때 유팽로 선생은 적의 파상공격에 의병들을 이끌고 잠시 후퇴했으나 고경명 의병장이 적진에 남아있다는 말에 말머리를 돌려 적진으로 돌진해갔다. 그리고 고경명 의병장을 구하기 위해 분전하다가 일본군의 칼에 맞아 장렬하게 전사했다. 이 전투에서 고경명과 그의 둘째 아들 고인후, 유팽로·안영 등의 의병장들이 의로운 죽음을 맞았다.

 

고경명 의병장 영정

 

 

장남 고종후는 금산성 전투에서 가까스로 살아남아 아버지와 동생의 시신을 수습해 후퇴했다. 그러나 고종후 역시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일본군과 싸우다 끝까지 전사한다. 광주광역시 남구에는 고경명과 두 아들, 조카, 함께 전사한 노비 등을 기리는 사당인 포충사가 있다. 광주역에서 남광주역을 잇는 도로인 제봉로는 고경명의 호를 따서 이름 지은 것이다.

 

고경명 의병장이 장렬히 전사한 충남 금산에는 고경명순절비가 세워져 있다. 순절비에는 제봉 선생의 일생을 다음과 같이 간략하게 정리하고 있다.

 

‘선생은 1588년(명종 13)에 문과에 장원급제한 후 중요한 직책을 두루 거쳐 동래부사에 이르렀는데 서인이 몰락할 때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광주에서 모집한 의병 6천여 명을 이끌고 1592년 7월 10일 금산에 침입한 일본군과 싸우다 눈벌(臥殷坪)에서 전사하였다’

 

이런 서술은 너무도 간략해 아쉬움이 크다. 조금 더 자세히 밝히자면 선생은 왜적이 한양을 점령했다는 소식을 듣고 의병을 일으켰다. 그는 말에 탄 채 격문(馬上檄文)을 써서 전라도 백성들에게 배포한 것으로 알려졌다. 선생의 명성을 흠모하던 유림들이 백성들과 가노를 데리고 선생의 곁으로 모여들었다. 그 수가 6천여 명이다.

 

선생은 60의 나이에 싸움터로 나갔다. 선생은 본디 문인이었던 탓에 칼을 어떻게 휘두를지도, 어떻게 군사를 움직여야할 지도 몰랐다. 오직 나라를 구해야겠다는 충성만으로 의병들을 이끌고 막강한 전력의 일본군과 맞서 싸웠다. 그러다가 아들 인후와 함께 금산전투에서 장렬히 전사했다. 첫째아들 고종후는 이듬해(1593) 2차 진주성 전투에 참전해 김천일, 최경회 장군 등과 순절했다.

장성 오동마을의 고경명의병장 신도비. 고경명의병장은 금산 산중에 매장됐다가 뒤에 화순군 흑토평에 모셔진다. 그리고 사후에 하사받은 장성 제봉산 자락으로 1609년 이장된다. 고경명의병장의 무덤이 장성읍 영천리 오동마을 뒷산에 있는 이유다.

 

 

선조는 제봉산 아래에 사당을 건립토록 한 뒤 고경명 3부자를 배향하고 포충’(褒忠)이라는 사액을 내렸다. 고경명 3부자는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불천위로 모셔졌다. 불천위는 4대가 넘어가도 조상의 제사를 영원히 지내도록 국가에서 지정하는 것을 말한다. 통상 제사는 아버지, 조부, 증조부, 고조부 4대까지 제사를 지내며 5대 조 부터는 제사를 모시지 않는다. 포충사는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 때에도 훼철되지 않았다.

 

포충사 옛 사당

 

 

고경명 선생의 후손들 또한 나라를 위해 삶과 목숨을 바쳤다. 고경명의 11대 후손 고정주(1863~1933)는 을사늑약이 맺어지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인 창평에 돌아와 창흥의숙을 세우고 후학을 양성했다. 고경명의 12대 후손인 고광순(1848~1907)은 의병을 일으켜 나라를 지키기 위해 싸우다가 1907년 지리산에서 순절했다.

 

#고경명선생순절비

 

 

 

포충사는 호남인들의 의로움과 용맹스러움을 드러내는 대표적인 사당이다. 이 사당은 호남을 의로운 고장으로 만드는 정신적인 지주 역할을 했다. 포충사는 광주 남구 포충로 767에 위치해있다. 1980년에 새로운 사당과 유물전시관, 정기관(正氣館), 외삼문, 정화비 등이 세워졌다. 옛 사당과 동서재는 새로운 사당 왼쪽 편 언덕위에 자리하고 있다.

 

정기관에는 고경명의병장과 관련된 많은 자료들이 전시돼 있다. 옛 사당으로 올라가는 길에는 충노봉이귀인지비’(忠奴鳳伊貴人之碑)라는 비석이 있다. 봉이와 귀인은 고경명 의병장 집안의 하인이었다. 금산전투에서 고경명의병장과 차남 인후의 시신을 수습했으며 다음해 장남 종후를 따라 진주성 전투에서 싸우다 전사했다. 주인과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장한 뜻을 기려 후세사람들이 비를 세운 것이다.

 

봉이와 귀인 충노비

 

 

임진왜란 당시 나라를 지키다 죽은 상당수는 의병이었다. 고경명의병장은 글을 읽고 짓는 문신이었지 칼과 활을 다루는 무관이 아니었다. 고경명의병장을 따라 싸움터로 나간 의병들상당수 또한 그 본분은 농사꾼이었다. 또 일부는 양반집의 종이기도 했다. 나라가 위태로울 때 농사꾼과 종들은 지역의 어른과 주인을 따라 전쟁터로 나갔다. 그리고 나라를 지키다 숨져갔다. 이 나라는 이런 이름없는 이들의 희생과 충절로 이어져 올 수 있었던 것이다.


 

의병장 고경명과 불천위(不遷位) 포충사(褒忠祠)

#포충사

 

 

 

고원희가옥 .  고경명의병장의 옛 집터이다 .  현재의 가옥은  1917 년 고원희의 증조부인 고종석이 지은 것으로 사당에는 고경명과 아들 종후 , 인후의 위패를 모신 부조묘가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