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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묘왜변과 영암의병
■ 을묘왜변과 영암의병장 양달사
▫을묘왜변, 남도땅이 아수라장이 되다
조선의 군사력은 1392년 건국 후 태평성대가 계속되고 문신들의 무신에 대한 무시가 계속되면서 매우 약해진다. 조정대신들은 공리공론을 일삼고, 국방력을 키울 생각을 하지 않았다. 전쟁준비를 소홀히 해 지휘관이나 군사들 모두 전투가 벌어지면 도망갈 생각부터 했다. 그 좋은 예가 1555년 발생한 달량왜변 때 거의 대부분의 지휘관들이 꽁무니를 빼거나 성안에 틀어박혀 싸우려 하지 않은 사실이다.
1552년 달량에 있던 수군진이 완도 가리포(加里浦)로 옮겨졌다. 달량진은 만호진(종4품)에서 최하급인 권관진(종9품)으로 격하돼 운영됐다. 중종10년(1555년) 왜구들은 조선수군들이 별로 없는 달량진에 상륙했다. 왜선 70여 척에 나눠 타고 온 6천여 명의 왜구들은 달량진성을 함락시키고 강진·장흥·완도·진도·영암을 공격하고 나주까지 진격하려 했다. 이를 달량왜변 혹은 을묘왜변(乙卯倭變)이라 한다.
달량은 지금의 해남군 북평면 남창리 일대의 포구를 말한다. 조선시대에는 남창을 달량진, 또는 우달도(右達島)라 불렀다. 왜구가 창궐했던 려말선초(麗末鮮初), 전라·경상도 해안 각처에는 수군진이 설치된다. 전라도 해남에는 송지 어란과 북평면 남창 달량진에 수군들이 주둔하는 진(鎭)이 설치됐다. 이어서 전라 수영(1440년)과 북평 이진포(梨津浦)에도 진이 들어섰다. 이진 마을은 해남반도 끝에 있는 해안가 마을이다.
현행 행정구역상으로는 전남 해남군 북평면 이진리다. 해안 건너편으로 완도가 있다. 손을 뻗으면 닿을 듯 그렇게 가까운 거리다. 해남반도의 달량과 이진은 고려 때부터 왜구들이 곧잘 침입해 왔다. 1483년에 왜선 수척이 달량에 쳐들어와 상선(商船)과 무명 50필, 쌀 30여 석을 약탈하고, 3명을 살해했다. 39년 뒤인 1522년에는 왜선 12척에 나눠 타고 온 왜구 80여 명이 달량에 상륙해 약탈을 자행했지만 조선수군들은 왜구들을 제대로 무찌르지 못했다.
그런데도 조선조정은 방비를 소홀히 했다. 그러다가 달량진에 대규모 왜구가 상륙해 전라도 남쪽 일대를 분탕질하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왜구들이 상륙해 백성들을 무차별로 죽이고 노략질을 하고 있다는 가리포 첨사 이세린(李世麟)의 보고를 받고 전라병사 원적(元績)이 강진 병영성의 군사를 이끌고 달량진성으로 급히 출동했다. 장흥부사 한온(韓蘊)과 영암군수 이덕견(李德堅)도 수하의 군사들과 함께 달량진성으로 향했다.
왜구들은 달량진성을 포위하고 공격을 시작했다. 성은 함락되고 말았다. 성을 지키기 위해 싸우던 전라병사 원적은 죽임을 당했다. 영암군수 이덕견은 포로로 잡혔다. 달량진 옆의 이진도 노략질을 당했다. 한편 당시 강진 병영성은 전라도지역 조선 군사(육군)의 총본부였다. 전라도 해안수비를 맡고 있었다. 병영성 주력부대가 달량진성 싸움에서 패한 뒤 전라도지역 조선군은 사실상 허수아비로 전락했다. 전라병사 원적이 전사하자 조선조정은 유사를 전라병사로 임명하고 급파했다.
또 장흥부사에는 벽사찰방이었던 이수남(李壽男)을 임시 장흥부사로 임명해 왜구들의 공격에 대비토록 했다. 그러나 새로 부임한 전라병사 유사는 왜구들이 몰려오자 성을 버리고 도망가 버렸다. 임시 장흥부사 이수남도 뺑소니를 쳤다. 5월 21일 병영성은 ‘함락’됐다. 그다음 날인 5월 22일에는 장흥성(長寧城)도 함락됐다. 5월 26일에는 강진읍성이 무너졌다.
그렇지만 실상은 ‘함락’이라고 표현하기가 부끄러운 상황이었다. 성을 지키던 전라병사와 장흥부사가 모두 줄행랑을 쳤으니 누가 성을 지킬 리 만무였다. 명종실록(권 18권 10년 26일자)에 따르면 전라도 각 읍성에 모습을 드러낸 왜구들은 불과 3~50명이었다. 조선군사들이 모두 도망가고 없어서 왜구들이 큰 병력을 동원해 공격할 필요도 없었다. 왜구들은 텅 비어있는 성에 유유히 들어와 식량과 무기들을 챙겨갔다.
당초 병영성은 왜구들로부터 전라도 해안을 지키기 위해 설치된 성이다. 그런데 조선조정은 방비를 게을리했다. 이 탓에 조선수비의 핵심기지인 병영성조차도 왜구들에 의해 함락되고 분탕질당하는 수모를 겪은 것이다. 왜구들은 해남과 강진, 장흥, 영암 일대를 마음껏 휘젓고 다니며 조선백성들을 죽이고 노략질을 했다. 해남에서만 현감 변협이 백성들과 같이 성을 잘 지켜 성이 함락되지 않았다.
국방력을 키우지 못해 산하가 짓밟히고 백성들이 능욕을 당하는 비극은 1592년 임진왜란과 1597년 정유재란 때 더 크고 처참하게 재연됐다. 을묘왜변은 임진·정유재란의 전조였다. 조정대신들은 나라 지키는 것을 소홀히 한 탓에 을묘왜변 때 남도 땅을 비롯한 조선팔도가 쑥대밭이 됐다는 사실을 망각했다. 아니, 교훈을 찾으려 하지 않았다. 지도자의 유약함과 조정대신의 어리석음은 결국 조선의 망국(亡國)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양달사의병장과 영암의병
강진병영성을 함락시킨 왜구들은 영암읍성 공격에 나섰다. 당시 영암에는 둘레길이 4.369척(尺), 평지높이 12척(尺)의 읍성이 있었으나 수천 명 왜구의 공격을 막아내기에는 매우 엉성했다. 적의 공격과 침입을 막기 위해 설치하는 해자(깊은 물웅덩이)도 당시에는 없었다. 영암을 수비하던 군사 수는 40여 명에 불과했다. 당시 영암은 조선시대 변방을 지키던 종 9품의 가장 낮은 군사조직 권관진(權官陳:)이 설치돼 있었다.
을묘왜란 당시(1555년) 영암의 인구는 4천여 명으로 추산된다. 이는 세종 때(1418년~1450년)조사한 영암의 인구가 총 1천229명이라는 점을 감안한 것이다. <세종실록>에는 영암의 전체 호수(戶數)가 333호로 기록돼 있다. 조선시대는 3년마다 인구조사를 했다. 그러나 10세 이하와 노비는 제외됐다. 절반이상의 인구가 누락됐을 것으로 보인다. 거기다 당시에는 추자도 등 24개의 큰 섬이 영암에 속했기에 영암인구는 4천 명 이상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왜구들은 영암까지 쳐들어왔다. 그리고 영암 향교에 진을 치고 영암읍성을 공격하는 한편 나주 근방까지 가서 노략질을 일삼았다. 이때 조선 조정에서 보낸 장수들은 왜구의 기세에 눌려 제대로 전투를 하지 않았다. 좌도방어사 남치근은 겁을 집어먹고 왜구가 있는 장흥으로 가지 않으려 했다. 우도방어사 김경석은 영암성 안에만 틀어박혀 있으면서 출전하지 않았다. 강진이 공격받고 있는데도 구원병을 보내지 않았다.
그러나 전주부윤 이윤경(전라도 도순찰사 이준경의 형)은 김경석에게 나가 싸울 것을 재촉하는 한편 성을 튼튼히 보수하면서 군사들을 잘 지휘해 왜구의 공격으로부터 영암성을 잘 지켜냈다. 우도방어사 김경석이 몸을 사리고 있는 동안 왜구들은 영암 일대에서 살인과 노략질을 저지르고 있었다. 이때 영암에서 의병을 일으킨 인물이 양달사(梁達泗)이다. 당시 양달사는 해남현감 직에서 물러나 고향인 영암군 도포 봉호정에서 시묘살이를 하고 있었다. 양달사는 형 달수와 함께 영암성 안으로 들어와 의병을 모집했다.
양달사는 1518년(조선 중종 13년) 도포면 봉호정에서 출생했다. 자는 도원(道源), 호는 남암(南巖)이다. 제주가 본관이다. 양달사는 어려서부터 담력이 크고 총명했다고 한다. 큰형 달수, 아우 달해·달초와 함께 학포(學圃) 양팽손(梁彭孫)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수학했다. 1536년(조선 중종 31년) 무과(武科)에 급제했다. 성환 성(城)의 찰방과 전라도 병영(兵營), 수영(水營)의 우후(虞候)를 지냈다. 진해와 해남 현감을 역임했다.
양달사는 왜구들을 현혹하기 위해 창우대(倡優隊, 農樂隊)를 조직해 왜구들이 바라볼 수 있는 야산 높은 곳에서 놀도록 했다. 창우대에는 광대들과 무장한 병사들이 섞여 있었다. 왜구들이 알록달록한 옷을 입은 광대패들의 놀이에 정신이 팔려있는 동안 양달사 의병장이 이끄는 의병들이 은밀히 다가와 왜구들을 기습했다. 일격을 당한 왜구들이 흩어지자 성안의 백성들이 징 등을 두드리며 공격에 합세해 왜구들을 많이 죽였다.
그런데 왜구의 반격이 시작됐다. 전주 부윤 이윤경은 꽁무니를 빼는 장수들과 관군들을 나무라고 독려해 전투에 임하도록 했다. 영암성 전투는 이윤경과 양달사 의병장이 주도했다. 전투는 무려 3일 동안 계속됐다. 죽은 왜구의 수가 100여 명에 달했다. 그때 나주로 가서 노략질을 하던 왜구들이 영암으로 돌아왔다. 왜구들은 조선관군과 의병들의 공격을 받아 본대(本隊)가 없어진 것에 깜짝 놀라 줄행랑을 쳤다.
전주 부윤 이윤경은 군사를 몰고 가 도망치는 왜구들을 모두 도륙할 것을 주장했다. 그러나 우도방어사 김경석이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몇 번을 간청한 끝에 김경석이 겨우 추격을 허락했다. 추격이 지체되는 바람에 이윤경과 양달사 군사들은 왜구 6명의 머리만 베어 성으로 돌아왔다.
영암전투를 고비로 해 달량진에 상륙, 전라도 내륙과 남해안 일대를 노략질하던 왜구가 모두 물러갔다. 만약 양달사의병장과 영암의병이 영암에서 왜구들을 물리치지 못했다면 왜구들은 전라도의 심장인 나주를 능욕했을 가능성이 컸다. 을묘왜변이 끝나자 조정에서는 영암전투 승리에 기여한 큰 신하들의 공을 논의했다. 그렇지만 좌도방어사 남치근과 전라순찰사 이준경 등에게 공이 돌아가고 양달사·양달수 의병장에게는 아무런 공로가 돌아가지 않았다.
그렇지만 양달사 의병장은 이에 대해 조금도 섭섭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공을 자랑하며 상을 구함은 부끄러운 일이다”며 시시비비 가리는 일을 멀리했다. 양달사 의병장은 영암전투 때 10여 군데에 깊은 상처를 입었다. 상처의 독이 깊어져 영암전투 1년 만에 41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이에 영암군민들은 눈물을 흘리며 “만약 양달사 의병장이 없었더라면 우리가 왜구로부터 어육을 당했을 것이다. 을묘년처럼 왜구를 물리친 일이 없었는데 양 의병장이 없었더라면 어떻게 그런 승리를 거둘 수 있었겠느냐? 그런데도 조정에서는 그 공을 몰라주고 다른 사람들에게만 공을 돌리고 있다”고 탄식했다.
얼마 뒤 장흥 관아의 벽에는 ‘조정이 을묘년 공신을 제대로 정하지 못했다’며 ‘비겁하게 행동했으면서도 공신이 된 사람들’을 힐난하는 벽보가 붙었다. 이 원벽(院壁)의 시에서 필자 미상의 작가는 을묘왜변의 가장 큰 공신으로 양달사를 꼽고 있다. 결국 양달사·양달수 형제의 공은 후세에 정당하게 평가됐다. 1777년 정조 1년에 신사준(愼師浚)이 기록하고 나주목사 임육(任育)이 쓴 행장(行狀:사람이 죽은 뒤에 그 사람의 평생 행적을 기록한 글)에는 이런 내용이 담겨 있다.
‘을묘년의 승첩을 모두 남치근(좌도방어사)과 이준경(전라도 도순찰사)의 공이라고 칭하고 양달사의 공은 거기에 넣지 않았다. 이는 (양달사)공이 겸손한 탓에 공을 세움에 자처하지 않은 탓이다. 게다가 자손이 미약해지고 세대가 점점 멀어져 그런 사적(史蹟) 마저도 묻히고 있으니 참으로 개탄스러운 일이다(후략)’
이후 200년이 지나 양달사는 좌승지(左承旨:조선시대 왕명출납을 맡아 승정원에서 근무했던 정 3품의 벼슬)에, 양달수는 사헌부 지평에 추증됐다.(<승정원일기> 헌종 13년, 1847년 10월 19일 자). 후세 사람들은 남암(南巖)양달사 의병장의 기개와 정신을 기리기 위해 그의 출생지인 도포면 봉호리 송죽정 마을에 남암정과 사우를 건립했다. 남암정의 건축연대에 관한 기록이나, 편액은 유실돼 전해진 것이 없다.
남암정 도로명주소 : 전남 영암군 도포면 자라봉길 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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