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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역사이야기 전라남도 누리집/남도의병

[전남역사이야기] 남도의병 9 - 의병장 최경회와 화순이 시댁인 논개

by 바람재이야기 2024. 9. 30.

 

 

 

 

 

 의병장 최경회와 화순이 시댁인 논개

 

 

최경회를 섬겼던 논개, 그녀와 화순의 인연

 

예부터 전남 화순은 충절의 고장이다. 임진왜란과 동학농민혁명, 구한말 의병활동, 6·25전쟁, 5·18항쟁 등 나라와 민족을 구하고 정의를 지키는 일에 많은 이들이 목숨과 삶을 바쳤다. 화순은 산과 물이 맑으면서 사람들 또한 품은 뜻이 장대한 곳이다. 풍요로운 산천을 닮아 사람들의 품성 또한 너그럽다.

 

화순에는 이 땅을 지키기 위해 장렬히 숨져간 이들을 기리는 곳이 많다. 능주 포충사와 삼충각(三忠閣), 충의사(忠毅祠), 고사정(高士亭), 쌍산의소 등이 바로 그런 곳들이다. 포충사는 임진왜란 당시 가장 처절했던 2차 진주성싸움에서 순절한 충의공 최경회 장군과 경암 문홍헌, 청계 구희, 상의재 오방한과 을묘왜변 때 순절한 월헌 조현 등 화순·능주 출신의 다섯 충신을 향사한 곳이다. 화순군 한천면 모산리 산15번지에 자리하고 있다.

 

능주 삼충각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삼충각은 최경회·문홍헌·조현 장군 등 세 충신의 애국 충정을 추모하기 위하여 1685(숙종 11) 능주향교 유림들이 건물 3동을 건립한 것이다. 능주면 잠정리 산 33-1에 자리하고 있다. 충의사는 최경회 장군의 호국정신을 기리기 위한 사원이다. 화순군 동면 충의로 409번지에 위치하고 있다.

 

고사정 / 네이버지도

 

고사정은 임진왜란 때 화순의 최경운·최경장·최경회 3형제와 최경장의 큰아들 최홍우, 최경운의 아들 홍재·홍수 등 6명이 각 고을에 격문을 띄워 의병을 모집했던 의병청이 있던 곳이다. 화순읍 삼천리에 있다. 최경운 등 3형제는 의병청을 설치한 뒤 가장 젊은 최경회에게 의병장을 맡도록 하고 일어선 의병을 전라우의병(全羅右義兵)이라 이름 지었다.

 

임진왜란 후 인조는 최홍우(최경장의 아들)에게 남주고사(南州高士:남쪽 지방의 이름 높은 선비라는 뜻)라는 칭호를 내렸다.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후손 최후헌(崔後憲)1678(숙종 4)에 정자를 세웠는데 이 정자가 고사정이다. 현판 글씨는 당대의 명필 이광사의 것이다.

 

쌍산의소는 구한말 양회일을 중심으로 화순의병들이 활동했던 곳이다. 이양면 증리 일대에 있는데 쌍산은 이곳 계당산의 별칭이다. 그런데 포충사와 삼충각, 충의사, 고사정은 모두 최경회 장군이 봉사(奉祀)돼 있거나 깊은 관련이 있는 곳이다. 최경회 장군의 활약상과 충정이 그만큼 컸다는 반증이다.

 

진주 논개제. 논개순국 재현극

 

 

그러나 아쉽게도 최경회 장군을 아는 이가 드물다. 그런데 더 놀라운 사실이 있다. 의로운 여인 논개의 남편이 바로 화순출신 최경회 장군이다. 논개(論介 15741593)의 성은 주()씨다. 따라서 논개의 정식 이름은 주논개다. 그녀는 2차 진주성싸움에서 의병을 이끌고 왜군과 싸우던 남편 최경회 장군이 항복하지 않고 남강에 몸을 던지자 관기로 변장해 왜장 게야무라 로쿠스케(毛谷村六助)를 남강가로 유인해 같이 죽은 여인이다.

 

화순은 논개의 시댁이 있는 고장이다. 화순이 논개와 깊은 관련이 있다는 사실에 많은 이들이 놀란다. 최경회 장군과 화순은 어떤 인연으로 만났을까? 그리고 그들의 죽음에는 어떤 사연이 깃들어있을까? 최경회 장군의 충정심을 기리는 사당들과 그와 그 형제들이 의병들을 모았던 곳들을 살펴보면서 최경회 장군과 논개를 만나보자.

 

 

최경회 장군과 주 논개의 인연

 

논개는 157493일생이다. 전북 장수군 계내면 대곡리 주촌마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주달문으로 주촌의 훈장이었다. 논개는 특이하게도 4갑술(甲戌, 갑술 년, , , )의 사주를 받고 태어났다. 주달문은 딸아이의 사주가 범상치 않다며 논개라 이름 지었다. 어머니는 밀양박씨로 양반가 출신이다. 논개는 주달문이 40세에 얻은 딸이다. 논개 위로 오빠가 한 명 있었으나 어린 나이에 죽었다. 주달문은 논개가 4살 때인 1578년 세상을 떴다.

 

논개는 이후 작은아버지 주달무의 집에서 자라났다. 그런데 주달무는 도박에 빠져 빚에 쪼들려 살던 인물이었다. 그런데 인근에 살던 김풍헌이라는 집에서 주달문에게 은밀한 부탁이 들어왔다. 김풍헌에게는 몸이 아픈 아들이 있었는데 논개를 민며느리로 보내주면 큰 돈을 주겠다는 것이었다.

 

진주시와 장수군은 '표준논개영정' 제작사업을 벌이고 있다. 사진 왼쪽은 김은호가 그린 '미인도 논개'이며 오른쪽은 '표준논개영정' 작가로 선정된 윤여환 교수의 작품


주달무는 어린 조카를 민며느리로 주겠다고 약조하고 돈을 받았다
. 이 사실을 뒤늦게 안 논개 어머니 밀양 박씨는 논개를 데리고 경상도(慶尙道) 안의현에 있는 친정으로 피해버렸다. 그러자 1579년 김풍헌은 이를 관가에 고발했고 결국 밀양박씨와 논개 두 모녀는 감옥에 갇히고 말았다.

 

그러나 두 모녀를 구해준 사람이 있었다. 바로 최경회 장수현감이었다. 당시 최경회 현감은 두 모녀의 사정이 매우 억울하다고 여겼다. 잘못은 조카를 돈을 받고 팔아넘긴 주달문에게 있었다. 최경회 현감은 두 모녀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그러나 두 모녀는 돌아갈 곳도, 생계를 꾸려갈 방법도 없었다.

 

논개의 어머니는 침방관비(寢房官婢)를 자청했다. 최경회 현감의 부인 나주 김씨는 이들 모녀가 내아 심부름을 하며 지내게 했다. 그 뒤 최경회 현감은 무장현감과 영암군수로 전직되는데 두 모녀 역시 따라가 최경회 부부를 섬겼다. 최경회가 영암군수에 부임한 때는 1582년으로 논개의 나이는 9살이었다.

 

최경회 영암군수는 1587년 사도시정으로 임명됐다. 사도시정(司䆃寺正)은 조선시대 궁중 창고의 미곡(米穀)과 궁내에 공급되는 장() 등의 물품을 맡아 본 사도시(司䆃寺)의 정삼품(正三品) 당하관(堂下官)을 말한다. 논개모녀는 최경회가 사도시정 임무를 수행할 때 보필하면서 곁을 지켰다.

 

윤여환 교수가 그린 논개영정이 국가표준영정으로 지정되었다

 

논개는 17살 되던 1590년에 최경회의 부실(副室)이 된다. 논개의 곧은 성품을 지켜본 최경회의 부인 나주김씨가 그리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나주 김씨는 몸이 허약해 남편의 수발을 제대로 들지 못했다고 한다. 나주 김씨는 젊고 예쁜 논개라면 남편을 잘 뒷바라지하고 기쁘게 해줄 것을 믿고 논개를 부실로 삼도록 남편에게 청한 것으로 알려졌다.

 

최경회는 1592년 임진왜란이 터지자 전라우도 의병장이 돼 최경운·최경장 두 형과 함께 의병을 모집하고 훈련시켰다. 19살이던 논개는 의병훈련을 뒷바라지하며 남편을 도왔다. 이듬해인 1593년 최경회가 경상우도 병마절도사로 제수돼 2차 진주성 전투를 할 때도 논개는 성안의 부녀자들과 함께 관군과 의병들의 수발을 들었다.

 

#주논개

논개 동상/두피디아

 

 

악전고투 끝에 진주성이 함락되자 의병장 최경회는 남강에 몸을 던져 순국했다. 이에 논개는 진주성 함락을 자축하는 왜병들의 잔치에 관기로 변장해 참여한 뒤, 왜장 게야무라 로쿠스케(毛谷村六助)를 촉석루 의암(義巖)으로 유인해 끌어안고 남강에 뛰어내려 남편의 죽음에 대해 복수했다.

 

수주 변영로 시인은 시 논개에서 논개를 이렇게 노래했다.

거룩한 분노는/ 종교보다도 깊고/ 불붙는 정열은/ 사랑보다도 강하다.

! 강낭콩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아리땁던 그 아미(蛾眉)/높게 흔들리우며/ 그 석류 속 같은 입술/ 죽음을 입 맞추었네.

! 강낭콩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흐르는 강물은/ 길이길이 푸르리니/ 그대의 꽃다운 혼/ 어이 아니 붉으랴.

! 강낭콩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그 마음 흘러라.

 

논개 기념관/두피디아
논개 사당/두피디아

 

 

<해주최씨세보>에 따르면 최경회의 첫부인 나주김씨와 재취 부인 여흥민씨는 모두 정경부인(貞敬夫人)의 칭호를 받았다. 정경부인은 종1품 문·무관의 정실부인에게 내리던 봉작이다. 여기에 논개를 뜻하는 의암부인 신안주씨부실로 기록돼 있다.

 

 

최경회 의병장과 진주성 전투

 

최경회장군/화순블로그

 

 

최경회 선생은 해주최씨(海州崔氏) 승지공파(承旨公派) 17세손이다.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선우(善遇), 호는 삼계(三溪일휴당(日休堂). 최충(崔冲)의 후손으로, 최천부(崔天符)의 아들이다. 1746(영조 22)에 충의공(忠毅公)의 시호를 받았다.

정조 때 만들어진 호남절의록(湖南節義錄)에는 해주최씨 승지공파 일문십창의(一門十倡義)’ 라는 말이 있다. 해주최씨 승지공파 한 가문에서 나라를 위해 절의한 인물이 10명이나 배출되었다는 뜻이다. 최경회 선생은 조선 성리학의 대가인 기대승의 제자이기도 하다.

 

최경회 선생은 1590년 어머니 임씨의 상()을 치르기 위해 벼슬에서 물러나 고향인 화순에 와있었다. 그런데 3년 상 기간 중인 1592년에 임진왜란이 발발했다. 그는 친형들과 함께 500여 명의 의병을 모집했다. 금산전투에서 고경명·유팽로 장군이 전사하자 고경명 휘하에서 군량 모으는 일을 했던 문홍헌이 최경회 선생을 찾아와 의병 지휘를 간청했다.

 

이에 경운, 경장 두형이 젊은 최경회 선생에게 의병을 맡도록 하자 최경회는 이제 부모님이 다 돌아가셨으니 내 몸을 나라에 바쳐도 된다. 부모에게 효도하듯이 나라에 충성을 다 하겠노라며 의병장으로 나서게 된다. 1592820일 선생은 전주로 진격하는 일본군을 무주 우지치에서 기습 공격해 큰 타격을 입힌다.

 

일본군 2만여명은 159210월 진주성을 공격한다. 그러나 당시 진주목사 김시민은 3800여 명의 군사와 의병 1천여 명을 이끌고 혈전 끝에 성을 지켜냈다. 이 전투에서 일본군 2만여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를 1차 진주성 전투라 부른다.

 

당시 일본군이 진주성 공격에 나설 준비를 하자 영남 의병장 김면(金沔)과 경상도관찰사 김성일(金誠一)이 최경회 장군에게 원군을 요청했다. 그러자 부장(部將)들과 고을 사람들이 몰려와 적군의 기세가 사방으로 뻗쳐 있는데 어찌 호남지방을 버리고 멀리 있는 영남을 구원해야 하느냐며 출병을 반대했다.

 

이에 최경회 공은 湖南我國之士 嶺右我國之地也(호남아국지사 영우아국지지야; 호남도 우리 땅이요 영남도 우리 땅)이라 일갈한 뒤 ()로써 일어난 사람들이 어찌 영남·호남을 가리겠는가라며 의병들을 이끌고 영남으로 출병했었다. 1차 진주성 전투에서 최경회 장군은 전라우의병을 이끌고 진주 살천창(薩川創)에 주둔하면서 일본군의 접근을 막았다.

 

이 공로로 최경회 장군은 경상우병사에 임명됐다. 1차 진주성 전투 승리 이후 최경회 공의 전라우의병과 임계영의병장이 이끄는 전라좌의병은 거창에 주둔하면서 영남의병 김면과 합동작전으로 개령에서 일본군을 크게 물리친다. 1593115일 성주성을 탈환한다.

 

최경회 장군과 임계영 장군이 이끄는 전라좌우의병의 활약상은 영남의병장 정인홍(鄭仁弘)이 작성한 통문(通文)에서 다음과 같이 잘 나타나 있다.

 

“지금 최경회, 임계영이 거느리는 양군(兩軍)은 적을 치는데 피차(彼此)가 없다면서 정병(正兵) 구천이 영남에 주둔하면서 성주와 개령 등지에 있던 적을 섬멸했습니다. 그 열렬한 의기(義氣)는 보고 듣는 이들을 감동시키니 이는 강토가 회복되려는 징조입니다”

 

영남의병장 조정(趙靖)은 호남의병의 용맹스러움에 대해 임란일기(壬亂日記)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호남의 풍속은 사납고 용감하여 전쟁에 임하면 장수와 병사는 겁내지 않는다. 번개 치듯 용감하게 돌진하니 능히 승리를 취한다”

 

 

일본군은 진주성 패전을 설욕하기 위해 1593610만여 명의 대병력으로 진주성 공격에 나섰다. 그러나 진주로 향하는 일본 지원군들을 진주 외곽에서 관군과 의병들이 막아내던 1차 진주성 전투와 달리 2차 진주성 전투 때는 영남의병부대를 이끌던 곽재우와 관군을 지휘하던 도원수 권율 부대는 전투에 참가하지 않았다. 전략의 차이 때문이었다.

 

진주성을 지키기 위해 모여든 군사의 중심은 호남의병이었다. 창의사 김천일이 이끈 군사 300명을 비롯한 전라우의병장 겸 경상우병사 최경회가 지휘한 군사 500, 복수의병장 고종후(고경명장군의 아들)의 군사 400, 전라좌의병 부장 겸 사천현감 장윤의 군사 300명이 진주성 사수를 위해 성에 들어갔다.

 

또 충청병사 황진의 군대 700명과 의병장 민여운의 군사 200, 의병장 이계련의 군사 100, 의병장 변사정의 부장 이잠이 이끄는 300, 진주목사 서예원(徐禮元)과 김해부사 이종인(李宗仁)의 군사 등이 합류했다. 그밖에 고득뢰와 보성의 오유(吳宥), 광양의 강희보(姜希輔), 강희열(姜希悅) 형제 등이 군사를 거느리고 진주성에 들어갔다. 3천의 군사와 7만명의 백성들은 모두 한 몸이 돼 10만명의 일본군을 상대로 싸움을 준비했다.

 

드디어 전투가 시작됐다. 일본군은 총력전을 펼쳤다. 일본군은 성 밖에서 토성을 쌓아 공격했다. 밤낮으로 성벽을 기어오르며 성을 함락시키려 했다. 일본군은 성벽을 허물기 위해 각종 공격을 해왔다. 조선 관군과 의병, 백성들은 성이 무너져 내리면 목숨을 걸고 다시 성을 복구해 적의 접근을 막았다.

 

그러나 때마침 장마가 시작됐다. 보수했던 성벽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화살도 떨어지고 창검에는 녹이 슬었다. 전투가 시작된 지 9일 만에 기어코 성이 무너지고 말았다. 성이 함락되자 전라우의병장겸 경상우병사 최경회 장군과 창의사며 도절제사 김천일, 고종후, 문홍헌 등 20여명의 장수와 의병장들은 북쪽을 향하여 네 번 절하고 투강했다.

 

1593629일의 일이었다.

최경회 장군등은 촉석루(矗石樓)에서 몸을 던지기 전에 피맺힌 목소리로 투강시(投江詩)를 다음과 같이 읊었다.

 

#투강시

 

矗石樓中三壯士(촉석루중삼장사)
촉석루 누각 위에 올라선 세 장사
一杯笑指長江水(일배소지장강수)
한잔 술에 쓸쓸히 웃으며 남강 물을 향하네
長江之水流滔滔(장강지수유도도)
남강 물이 유유히 흘러가니
波不竭兮魂不死(파불갈혜혼불사)
저 강이 마르지 않는 것처럼 한 우리 넋도 죽지 않으리

 

 

최경회 장군은 함께 죽으려는 조카 최홍우에게 무주대첩에서 노획한 언월도와 공민왕이 남긴 청산백운도, 조복을 건네주며 둘째 형 경장에게 유품을 전할 것을 부탁한다. 그러면서 내가 죽은 줄 알면 형님이 필히 의병을 일으키실 것이니 너는 후일을 기약하라며 탈출할 것을 종용한다.

 

아들 최홍우로부터 동생 최경회 장군의 순절소식과 유품을 받아든 둘째 형 최경장 장군은 화순에서 1593년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을 무찌르는데 큰 공을 세운다. 그리고 최홍우 선생 역시 또한 부친을 도와 각종 전투를 승리로 이끈다. 최경회 장군에게는 1753(영조 29) 충의(忠毅)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좌찬성에 추증되었으며 화순의 포충사와 삼충각, 진주성 내의 창렬사, 장수 월강사에 배향돼 있다.

 

 

최경장 선생 후손이 보관중인 일본군 장수의 언월도

 

최경회 장군은 활을 매우 잘 쏘았는데 우지치전투에서 200보 밖의 일본군 장수를 활을 쏴 죽이기도 했다. 무주대첩에서 선생은 왜군의 장수가 사용하던 언월도(偃月刀)를 빼앗았다. 이 언월도는 길이 53cm, 자루가 135cm인 총길이 193cm의 큰 칼이다. 양날이 서있고 등은 굽었는데 칼날에 모루미치(盛道) ()’이라는 칼을 만든 사람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이 칼은 풍신수길(豊臣秀吉)이 다이묘(大名)급 장군에게 하사한 칼인데 원래는 자웅검이라 해서 한 쌍의 칼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일본에 남아 있는 다른 한 개의 언월도는 일본의 국보급 문화재이다. 이 언월도는 최경회 장군이 2차 진주성전투에서 순절하기 직전 조카 최홍우에게 건네져 후손들에게 전해진 것으로 알려졌다.

 

충의사에는 이 언월도 모조품이 최경회 장군이 입었던 갑옷등과 함께 전시돼 있다. 진품은 최경장 선생의 후손들이 보관하고 있다. 일제 강점기에 일본 경찰은 이 언월도를 빼앗기 위해 후손들을 마을 앞 향나무에 매달아 놓고 고문했으나 후손들은 이 칼을 땅속에 묻어놓고 끝끝내 밝히지 않았다고 한다.

 

언월도는 오랜 세월 땅에 묻혀 있었던 탓에 나무로 된 손잡이 부분은 없어지고 말았다. 칼날 곳곳에 녹이 슨 언월도는 광복과 함께 빛을 보았으나 6·25 전쟁 때는 경찰에 압수당해 경찰서 화로 부지깽이로 사용되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최경장 선생 후손들은 우여곡절 끝에 이 언월도를 다시 찾아와 가보로 보관하고 있다.

 

최경회 장군을 모시고 있는 충의사에는 전라우의병의 깃발도 전시돼 있다. 깃발에는 골()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이는 골입아군(鶻入鴉郡)이라는 글귀에서 따온 것이다. 골입아군은 송골매가 갈까마귀 무리 속으로 들어가 갈까마귀를 흩어지게 한다는 뜻이다. 즉 용맹한 자가 사악한 사람들을 단숨에 흩어버린다는 것으로 의병이 왜병을 쉽게 무찌를 수 있다는 의지를 나타낸 것이다.

 

 

최경운 선생과 오성산 전투

 

최경운 의병장은 동생 경장·경회, 아들 홍재·홍수, 조카 홍우 등과 함께 화순 삼천리 고사정에 의병청을 설치하고 의병을 모집했다. 사재를 털어 병마와 군량미를 마련한 뒤 의병들을 훈련시켜 일본군에 맞서 싸웠다. 1597년 정유재란 때는 73세라는 고령에도 불구하고 의병을 일으켰다.

 

일본군이 화순으로 들어오자 집안 가솔들과 인근 백성 등 200여명을 이끌고 화순 오성산성으로 들어가 일본군 3천여명을 상대로 3일간을 싸웠다. 15971017일 최경운 의병장은 차남 홍수 및 200여 명의 주민들과 함께 포로로 잡혀 참수 당했다.정조는 오성산 정상에 진사 최경운 전망 유허비를 세우고 그의 장한 뜻을 기렸다. 1789(정조 13)에는 다산마을(다지리)에 삼충사(三忠祠)를 건립해 최경운·최경장·최경회 3형제를 배향했다.

 

 

최경회 장군과 논개의 묘

 

최경회 장군과 논개의 묘는 경남 함양군 서상면 방지리의 당산 뒤편 골짜기에 자리하고 있다. 진주성싸움에서 살아남은 의병들은 낙동강에서 최경회 장군과 논개의 시신을 낙동강에서 건져냈다. 일본군의 눈을 피해 비밀리에 운구해오다가 더 이상 어쩔 수가 없어 몰래 한밤중에 방지리 골짜기에 묻었기 때문이다.

 

 

 

최경회 장군과 논개의 묘는 지난 1976년 발견돼 최근 사적지로 지정됐다. 그렇지만 논개의 신분에 대해서는 상당한 오해가 남아있다. 국민적인 재인식이 절실하다. 논개가 관기(官妓)로 인식되고 있는 것은 유몽인이 <어우야담>을 지으면서 논개를 진주 관기로 묘사했기 때문이다.

 

유몽인은 어우야담을 쓰면서 논개를 왜장 게야무라 로쿠스케를 유인해 껴안은 뒤 남강에 투신한 진주 기생으로 밝혔다. 그 탓에 많은 국민들이 논개를 관기로 여기고 있다. 그렇지만 논개는 최경회 장군의 제2부인이었다. 남편을 따라 전쟁터를 따라다니며 의병들을 뒷바라지한 용감한 여인이었다.

 

또한 남편의 복수를 갚기 위해 기생으로 변장해 일본군들의 잔치에 끼어들 만큼 지혜가 있었다. 열 손가락에 반지를 끼어 일단 왜장을 껴안으면 손이 풀어지지 않도록 만반의 준비를 하고 왜장을 유인할 만큼 치밀하고 주도면밀한 여인이었다. 약한 여인의 몸으로 남편의 원수를 갚아낸 열부(烈婦)였다.

 

이런 여인이 기생이라는 허물을 벗어내지 못하고 있는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기가 막힌 것은 일본에서 주논개가 왜장 게야무라 로쿠스케의 연인 정도로 여겨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우에쓰카 하쿠유라는 한 일본인의 억지스러운 역사왜곡에서 빚어진 일이다.

 

건축설계사였던 우에쓰카 하쿠유는 은퇴한 뒤 자신의 소유인 후쿠오카현 다가와시 근처 히코산 기슭의 밭에서 일을 하다가 묘비를 발견한다. 1970년의 일이다. 그 묘비에는 비석에는 조선정벌(임진왜란) 때 이름을 떨친 게야무라 로쿠스케의 이야기가 새겨져 있었다.

 

우에쓰카는 용맹스러운 장수 게야무라가 조선여인의 꼬임에 넘어가 숨진 것이 왜장의 죽음답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1973년 진주시를 방문해 한·일간의 역사적 화해를 명분으로 삼아 논개와 게야무라의 넋을 건져 이를 일본으로 모셔가는 의식을 치렀다.

 

그런 다음 히코산에 게야무라와 논개의 무덤을 만들었다. 논개가 장렬히 몸을 던진 진주시에서는 모래와 나무·흙 등 논개의 고향 장수에서 돌을 가져와 게야무라의 무덤 옆에 논개 무덤을 조성했다. 또 진주 촉석루 옆 의기사에 걸려있는 논개 영정과 똑같은 영정을 제작해 일본으로 가져갔다.

 

지금 논개의 영정은 히코산 기슭에 게야무라의 아내, 처제와 나란히 놓여있다. 일본인 중 상당수는 논개에 대해 조선정벌 중에 게야무라를 만난 논개가 전쟁이 끝난 뒤 게야무라를 따라 일본에 건너와 함께 해로하다 죽은 여인으로 여기고 있다. 참으로 어처구니없고 분통터지는 일이다.

 

의병장이었던 남편의 복수를 갚기 위해 순절한 부인을 정작 왜장을 흠모해 일본까지 따라와 함께 살았던 여인으로 왜곡하고 있으니 이보다 더한 역사왜곡이 따로 없다. 해주 최씨 종회는 이에 대한 시정을 일본 측에 요구하고 있으나 우에쓰카는 논개가 최경회 장군의 부인임을 몰랐다며 발뺌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일은 일본에서만 벌어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곳 한국에서도 벌어지고 있다. 지난 2004년에 건립돼 최경회를 봉사(奉祀)하고 있는 충의사에는 논개를 기리고 있는 의암영각(義岩影閣)이 있다.

 

의암영각에는 논개의 영정이 두 개 걸려있다. 그런데 그중 하나는 친일 화가인 이당(以堂)김은호(金殷鎬)가 그린 것이다. 후손들은 논개를 이중삼중으로 욕보이고 있다. 후손들의 무관심은 논개를 왜장의 여인으로 여기게 하고 있으며 친일 화가가 논개의 영정을 그리도록 방관했고, 그 영정은 버젓이 충의사에 놓여 있다.

 

논개는 기생이 아니다. 의병장의 아내다. 남편인 최경회 의병장의 분통한 죽음에 대한 복수를 아녀자의 몸으로 장하게 해낸 의롭고 기개 높은 조선의 여인이다. 그런 여인을 우리가 제대로 모시지 못하고 있는 것은 매우 부끄러운 일이다. 주논개의 시댁이 화순인 만큼 화순군과 전남도의 적극적인 논개 알리기와 선양노력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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