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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역사이야기 전라남도 누리집/남도의병

[전남역사이야기] 남도의병 10 -충장공 김덕령의병장

by 바람재이야기 2024. 10. 7.

 

 

충장공(忠壯公) 김덕령(金德齡)

 

충장공 김덕령 .  상상화

 

 

선조(宣祖), 김덕령 의병장 등 구국영웅들을 죽음으로 몰아넣다

충장공(忠壯公) 김덕령(金德齡)은 비운의 의병장이다. 환란에 빠진 나라를 위해 온몸을 바쳐 왜군과 싸웠으나 역적이라는 무고를 받았다. 무능하고 의심 많은 선조는 김덕령을 모질게 고문케 했고 결국 김덕령은 다리뼈가 부스러지고 온몸이 만신창이가 돼 죽고 말았다. 선조는 역적이라는 모함을 받은 충청도 의병장 이산겸(李山謙)도 고문해 죽였다. 같은 혐의를 받은 홍의장군(紅衣將軍) 곽재우 의병장은 가까스로 옥에서 풀려나 목숨을 건졌다.

 

선조는 이순신장군도 모질게 대했다. 입만 살아있는 대신들의 말을 듣고 이순신에게 부산포 진격을 명령했다. 그러나 이는 수적으로 월등히 많은 왜군들의 소굴로 들어가 죽으라는 말이나 마찬가지였다. 조선수군의 주력선인 판옥선의 화력이 우세하고 선체가 강하기는 하나 등선전투(登船戰鬪)에 능한 왜군들의 해상백병전에는 어쩔 방도가 없었다. 조선수군을 끌고 가 모두 죽으라는 말과 같은 명령을 이순신은 거부했다.

 

선조는 명령불복종을 이유로 이순신을 잡아들여 고문하고 사형을 명령했다. 영남 출신 유학자로 당시 우의정이었던 약포(藥圃) 정탁(鄭琢)이 상소를 올려 이순신의 처형을 극구만류하자 모든 관직을 빼앗고 백의종군토록 했다. 선조는 이에 앞서 1589(己丑年) ‘정여립(鄭汝立)의 음모고변이 일어나자 정철에게 수사권한을 주어 동인에 속한 1천여 명의 호남사림과 문신들을 죽였다. 왕권을 위해 능력 있는 신하들의 목숨 빼앗기를 파리 죽이는 것처럼 쉽게 여긴 것이다.

 

선조는 인재를 아끼지 않았다. 임진왜란 발발 2~3년 전 실체도 불분명한 역모사건(己丑獄事)을 빌미삼아 1천명을 죽이고 500여명을 귀양 보내는 등 나라를 피바다와 아수라장으로 만들어 버렸으니 나라 힘이 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나라가 곧 망할 지경에 이르렀어도 편견과 시기심에 빠져 의병장들을 쉽게 고문하고 죽였다. 이순신을 비롯한 조선장수들과 의병들이 목숨 걸고 싸워 올린 전과도 제대로 평가하지 않았다.

 

임진왜란 초기에는 나라의 목숨이 의병들 덕분에 유지됐다”(159261일자 <선조수정실록>)고 말하기도 했으나 그 뒤로는 조선 사람들이 한 것은 별로 없고 왜적을 평정한 것은 오로지 명나라 군사 덕분이다는 입장을 유지했다. 이순신이 명량해전에서 대승을 올린 것에 대해서 명나라 장수 양호가 극찬하자 통제사 이순신이 사소한 왜적을 잡은 것은 그의 직분에 마땅한 일이며 큰 공이 있는 것도 아니다”(15971020일자 <선조실록>)고 폄훼했다.

 

선조에게는 왕의 자리만 중요했다. 나라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웠던 조선 군사와 의병장들의 충성스러운 마음은 헌신짝처럼 여겼다. 조선장수와 의병장들이 환란 당시에 어떻게 싸웠는지를 우선 헤아리고 따져봐야 하는데도 역모연루자라는 고변이 들어오면 무조건 잡아들여 고문하고 처형하려 했다. 정여립 음모사건 때 서산대사(西山大師) 휴정이 끌려가 선조에게 국문을 받고 사명당(四溟堂) 유정 역시 조사를 받은 것은 선조의 이런 너무도 이기적이고 파탄적인 성격때문이다. 조선역사에 있어서 가장 부끄러운 왕이다.

 

 

충장공(忠壯公) 김덕령(金德齡)

 

김덕령은 1567년 지금의 광주광역시 북구 충효동에서 태어났다. 20세 때 형 덕홍(德弘)과 함께 성혼(成渾)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배웠다. 1592(선조 25)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형 덕홍과 함께 고경명(高敬命)의병장의 휘하에 들어갔다. 담양의병 5천여 명과 함께 전주에 이르렀을 때 형 덕홍이 고향으로 돌아가 어머니를 봉양하라고 권고하자 귀향했다.

 

형 덕홍이 금산전투에서 고경명의병장과 함께 순절하고 어머니 또한 세상을 떠나자 본격적으로 의병활동을 시작했다. 김덕령 의병부대의 세력이 높아지자 장성현감 이귀(李貴), 담양부사 이경린(李景麟)의 추천으로 선조로부터 형조좌랑의 직함과 함께 충용장(忠勇將)의 군호를 받았다. 1594(선조 27) 1월 김덕령은 의병을 이끌고 왜군들이 발호하는 경상도 지역으로 진군했다. 그리고 진주에 진을 치고 왜군과 맞섰다.

 

이 때 조정에서는 각지에서 경상도 지역으로 몰려온 의병들을 조선관군에 흡수해 통제하려 했다. 이를 위해 각도의 의병들을 모두 김덕령의병부대로 예속시켰다. 이 때문에 김덕령 의병장의 위상이 크게 높아졌다. 김덕령은 왜군들이 남해안 일대 왜성(倭城)에 들어가 전투를 회피하는 바람에 큰 전공을 세우지는 못했다. 그렇지만 장문포에서 충무공 이순신과 수륙 연합전에 참가한 것을 비롯해 방비를 잘 했기 때문에 왜군들이 쉽게 약탈에 나서지 못하는 역할을 했다.

 

주검동 .  무등산 원효계곡에 있는 제철유적이다 .  김덕령의병장이 의병을 일으키고 이곳에서 무기를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  광주광역시 기념물 제  21 호로 지정돼 있다 .

 

 

김덕령 의병부대가 있기 때문에 왜군들이 쉽게 쳐들어오지 못하자 김덕령에 대한 백성들의 기대와 신망이 매우 높아졌다. 특별한 전공이 없었지만 백성들의 높은 신망 때문에 김덕령은 곽재우의병장과 버금가는 용맹스러운 의병장으로 자리매김 됐다. 경상도 지역에서 김덕령관련 전설과 설화가 많은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1594년 세자의 분조(分朝)로 세워진 무군사(撫軍司)에서 광해군으로부터 익호장군(翼虎將軍)이라는 칭호와 함께 군기를 받았다. 곧이어 선조는 김덕령에게 초승장군(超乘將軍)군호를 내렸다. 1595년 고성 지방에 상륙하려는 왜군을 격퇴해 선조로부터 충용군(忠勇軍)군호를 받았다.

 

김덕령은 엄한 군율로 의병부대를 통솔했다. 1596년 도체찰사 윤근수의 종이 탈영하자 종의 아비를 잡아들여 행방을 추궁했다. 윤근수가 아비를 풀어줄 것을 부탁했음에도 김덕령은 아비에게 매를 때려 숨지게 했다. 이로 인해 윤근수의 반감을 체포됐으나 왕명으로 풀려났다. 그렇지만 의병들은 그의 엄격한 군율시행에 불만을 품었고 이런 사실이 전해지자 다시 체포돼 옥에 갇히기도 했다. 하지만 우의정 정탁의 적극적인 사면요청에 의해 풀려났다.

 

1596년 충청도 홍산 지역에서 이몽학의 반란이 일어났다. 김덕령은 반란군을 토벌하기 위해 충청지역으로 군사를 이끌고 갔으나 싸움터에 도착하기 직전 반란군은 토벌됐다. 관군이 반란군을 문초하던 중 어떤 졸개가 고문을 견디다 못해 김덕령과 홍계남 최담령 등 당시 명망이 높았던 의병장들을 가담자로 무고했다. 선조는 김덕령을 잡아들이라 명하고 26일 동안 옥에 가둔 상태에서 여섯 차례에 걸쳐 잔혹한 고문을 가했다.

 

김덕령은 억울함을 호소하며 결코 반란에 가담하지 않았다고 읍소했다. 그렇지만 선조는 이 말을 믿지 않았다. 조정대신들도 김덕령이 역모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구명에 나서지 않았다. 김덕령을 거들다가는 자칫 자신까지 역모자로 몰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류성룡이 김덕령이 반역에 가담했는지 여부를 신중히 조사해야 한다고 간청했으나 윤근수의 형제인 서인 판중추부사 윤두수는 엄벌을 주장했다

 

 #압슬형

김덕령은 형장에 묶여 나와 매질과 압슬형(壓膝刑:나무나 사금파리 위에 꿇어앉은 죄인의 무릎 위에 무거운 물건을 올려놓고 압력을 가하는 고문의 일종)을 받았다. 김덕령은 정강이뼈가 부러지자 무릎으로 기어가며 선조에게 억울함을 호소했다. 하지만 선조는 김덕령이 무릎으로 기어 다니는 모습조차 반심(叛心)을 품은 모습이라며 괘씸하게 여겼다. 선조는 김덕령이 곤장을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니 참으로 역적이로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김덕령장군묘소 ( 가장 위쪽에 자리하고 있다 )

 

 

위쪽부터 김덕령의병장 ,  증조부증조모 ,  아버지 묘가 자리하고 있다

 

 

 

김덕령은 매질과 압슬형 등 모진 고문에 시달리다가 팔다리가 모두 부러진 채 결국 옥에서 죽고 말았다. 30세 나이였다. 나라와 임금, 백성을 구하겠다는 그의 충성심은 반역심으로 왜곡돼 버렸다. 의병장 김덕령은 그렇게 처참하게 죽임을 당했다. 선조의 편견과 비겁하고 간악한 조정대신들의 모함이 빚은 참담한 결과다. 김덕령의 억울한 죽음을 지켜본 선비들은 더 이상 의병장으로 나서려 하지 않고 모두 몸을 숨겨버렸다.

 

 

이몽학(李夢鶴)의 난

 

반란의 조짐인 민심이반은 1592년 임진왜란 발발과 함께 조선 여러 곳에서 터져 나왔다. 선조가 조정대신들과 함께 한양을 버리고 도망가자 백성들은 무책임한 왕과 대신들에게 배신감을 느꼈다. 백성들은 왕이 도망가고 비어있는 경복궁과 창덕궁, 창경궁에 불을 질렀다. 그리고 값비싼 것들을 약탈했다. 궁궐은 텅 비어있었고 막는 이들도 없었다. 버려진 백성들은 분풀이를 그렇게 했다. 궁궐형조와 노비문서를 관리하는 장예원, 선조의 맏아들 임해군의 집도 태워버렸다.

 

일부 백성들은 천대받고 고생뿐인 무지렁이 신세보다는 왜군에 붙어 조금이라도 편하게 사는 방법을 택했다. <조선실록><난중일기>등에는 왜군의 앞잡이가 돼 조선 관리들을 지목해 죽이거나 체포토록 한 향리(鄕吏)들이 등장하고 있다. 이순신은 이들을 붙잡아 처형하곤 했다. <선조실록>1592628일자에는 왜군의 편에 서서 조선관군과 의병들을 공격하는 조선백성들의 행태를 지적하는 김성일의 장계내용이 아래와 같이 실려있다.

 

수사(원균)가 성으로 들어가려고 고성현(固城縣)인근 해안에 배를 대자 왜군 100여명이 조선을 배반한 백성들을 데리고 와서 재차 성을 점거했습니다.(중략) 왜군 수는 몇 되지 않지만 그 중 절반이 배신한 백성들(半是叛民)이니 매우 한탄스럽습니다.’

 

백성들은 수탈만 하다가 정작 왜군이 쳐들어오자 자신들을 지켜주기는커녕 도망가기 바쁜 관리들을 보며 그들의 허울 좋음을 알았다. 그리고 뒤집혀진 세상이 오히려 자신들에게는 기회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1593년 전쟁이 소강상태에 접어들자 조선 곳곳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김희(金希)와 고파(高波), 인걸년(林傑年) 등 대규모 반란군이 지리산 일대를 근거로 해 발호했다. 15941월에는 송유진 무리가 한양으로 진격할 정도로 세를 키우다가 토벌당하기도 했다.

 

송유진의 반란 26개월 뒤에 일어난 것이 이몽학의 난이다. 이몽학은 서얼(庶孼:첩에게서 생겨난 자식)출신이다. 이몽학은 아버지의 미움을 받아 충청도·전라도를 떠돌아다니던 중 군량미를 모으는 역할의 모속관(募粟官) 한현(韓絢)의 밑에 들어가 일을 하게 됐다. 한현은 관원이기는 송유진의 난 연루자라는 의심을 받고 있었다. 그 역시 서얼출신으로 세상에 대한 불만이 많았다.

 

1596(선조 29) 이몽학과 한현은 충청도 홍산현(鴻山縣:지금의 부여) 무량사에서 역모를 모의하고 서얼출신과 농민 6~700명을 모았다. 왜란으로 나라가 황폐해지고 먹고 살기가 힘들어진 백성들은 왜적을 물리치고 나라를 바로 잡겠다는 이몽학의 말에 크게 호응했다. 이몽학이 이끄는 군사들은 홍산현을 비롯 인근 고을을 차례로 함락시키고 크게 세를 떨쳤다. 반란군의 수가 수천 명으로 늘었다.

 

이몽학은 반란군에게 김덕령은 장군을 비롯 도원수와 병사수사도 모두 우리 편이다고 거짓으로 말했다. 반란군에 가담한 백성들은 그 말을 믿고 힘을 내 관군과 싸웠다. 이몽학군은 홍주성으로 진격했다. 홍주목사 홍가신(洪可臣)은 거짓 항복을 하고 시간을 끌면서 구원을 요청했다. 충청병사 이시언이 이끄는 토벌군이 오기는 했으나 오히려 반란군에 밀려 버렸다. 이에 조정은 김덕령장군에게 지원군을 이끌고 권율장군과 함께 반란군을 진압토록 했다.

 

이몽학반란군은 홍주성을 공격했다. 반란군이 몰려오자 성위에서 있던 무인들이 반란군들을 진압하기 위해 김덕령장군이 군사를 이끌고 오고 있다고 밝히면서 이몽학의 머리를 잘라오면 죄를 용서해주겠다는 선무공작을 벌였다. 이에 반란군은 크게 동요했다. 결국 이몽학의 부하들이 이몽학을 살해해 머리를 베었고, 반란군은 뿔뿔이 흩어졌다. 한현을 비롯해 죄가 무거운 자 100여 명은 한양으로 압송돼 처벌됐다.

 

그런데 이몽학반란의 진상을 밝히기 위해 한현을 고문하는 과정에서 의병장 김덕령과 홍계남(임진왜란 때 부천 지역에서 활동한 무신), 곽재우, 최담령(남원 출신 의병)이 반란에 가담했다는 소문이 퍼졌다. 이몽학이 반란이 성공할 것이라는 믿음을 주기위해 거짓으로 농민들에게 한 말을 선조는 곧이들은 것이다. 결국 선조는 김덕령과 홍계남, 곽재우, 최담령 등을 잡아와 친국(親鞫:왕이 직접 죄를 조사하는 것)했다. 홍계남과 곽재우는 풀려났으나 김덕령은 모진 고문을 받다가 목숨을 잃었고 최담령은 처형당했다.

 

이몽학의 난은 선조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선조는 왕의 자리를 위협받는 것이나, 자신보다 더 인기가 많은 신하에 대해서는 거의 병적인 대응을 했다. 정철을 이용해 호남사림 1천여 명을 처형한 것은 당쟁을 이용해 왕권을 강화한 술책의 하나였다. 실체가 불분명한 정여립의 역모사건을 명분으로 삼아 세력이 커지던 동인을 견제했던 것이다. 백성들의 신망을 얻은 의병장이나 이순신을 제거의 대상으로 여긴 것은 그의 정신세계에 상당한 문제가 있었음을 반증한 것이다.

 

대신들이 그토록 경원하고 못미더워한 원균을 중용한 것은 이순신에 대한 질투와 반감이 작용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선조는 1597716일 칠천량 해전에서 조선수군이 전멸하자 극도의 불안에 빠졌다. 그래서 파직시켰던 이순신을 722일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전라좌수사 겸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했다. 선조는 교서에서 이순신을 통제사에서 물러나게 해 결과적으로 조선수군이 몰살당했다고 자책했다. 그리고 백의종군하게 한 것에 대해서도 사과하고 있다. 그러면서 나라를 구해달라고 간청했다.

 

선조는 이순신을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하면서 아무런 지원을 하지 않았다. 병력도, 군량도, 전선 한척도 보내지 않고 수군을 다시 일으켜서 왜군을 무찔러달라고 말하고 있다. 참으로 무책임하고 뻔뻔스러운 왕이다. 더 가관인 것은 이순신이 한창 조선수군을 재건하고 있었던 87일에 조선수군의 전력이 너무 약하니 권율의 육군에 합류해 전쟁에 임하라는 유지(諭旨)를 내린 것이다. 줏대도 없고 지략도 없다. 그런 왕이었으니 조선의 산하가 왜군의 말발굽에 짓밟힐 수밖에 없었다.

 

 

충장사(忠壯祠)

 

충장사

 

 

김덕령 의병장은 1661(현종 2)伸冤(伸寃:억울함이 밝혀지는 것)됐다. 1668(현종 9) 병조참의에 추증됐다. 1678(숙종 4)광주 벽진서원에 제향되고, 1680(숙종 6)에는 장군의 충효를 기리는 사당에 의열사(義烈祠)가 사액(현판이 보내지는 것)됐다. 1785(정조 9)에 병조판서에 추증되고, 충장공(忠壯公)의 시호가 내려졌다.

 

김덕령의 부인인 흥양 이씨의 정절을 기리는 비석도 세워졌다. 흥양 이씨는 정유재란 때 일본군에게 쫓기다 담양 추월산 절벽에서 몸을 던졌다. 정조는 1788년 김덕령의병장이 태어난 마을에 증병조판서 충장공 김덕령 증정경부인 흥양이씨 충효지리’(贈兵曹判書忠壯公金德齡贈貞敬夫人興陽李氏忠孝之里)’라는 비석을 세우게 했다.

 

김덕령의병장의 아들 김광옥(金光沃)은 주위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전북 익산시 용안면으로 몸을 피해 목숨을 부지했다. 김광옥은 신분을 감추며 살다가 외삼촌 이인경(李寅卿)의 부임지인 평안북도 안주군 운곡면 쇠꼴이로 옮겨가 살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김덕령의 동생 김덕보는 형이 억울하게 죽자 화순군 동복으로 들어가 세상을 등지고 살다가 지리산 백운동으로 다시 거처를 옮겼다.

 

김덕보는 1597년 악양(지금의 경남 하동군 악양면 평사리)에 있는 이정란의 집을 빌려 살고 있었다. 그런데 백의종군 중이던 이순신이 비가 억수처럼 쏟아지던 526일 김덕보(난중일기에는 김덕린으로 기록돼 있다)의 집을 두드려 하룻밤 묵어가기를 간청했다. 김덕보는 이를 거부했다. 이순신은 아들 열을 시켜 간청토록 해 억지로 들어가 하룻밤을 잤다.

 

김덕보는 이순신과 끝내 얼굴을 마주하지 않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선조의 의심과 변덕 때문에 형 덕령은 목숨을 잃었다. 이순신 또한 나라를 구한 영웅임에도 선조의 미움을 받아 백의종군의 모욕을 받고 있어 동병상린의 마음을 가졌을만한데도 그러질 않았다. 아마도 이순신의 모습에서 선조에게 배척당한 형 김덕령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에 외면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김덕보는 1602년 광주로 돌아와 고향 근처에 있는 무등산 원효 계곡 아래에 조그만 정자를 짓고 살았다. 이 집이 바로 풍암정(楓巖亭)이다.

 

1946년 김덕령 의병장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광주광역시 동구 충장로 입구부터 경열로와 연결되는 도로를 충장로(忠壯路)로 명명했다. 1974년 충장사(忠壯祠)를 복원하는 과정에서 김덕령 장군을 배향했다. 당초 김덕령의병장의 시신은 역적으로 몰린 뒤끝이라 문중의 무덤에 안장되지 못하고 멀리 떨어진 곳에 묻혔다. 1965년에야 광산 김씨의 무덤이 모여 있는 이치(梨峙:배재)로 이장됐다.

 

김덕령장군의 관곽

 

 

이때 김덕령의병장의 관을 열어보니 시신이 썩지 않고 뼈에 붙어 있는 살이 많았다고 한다. 사람들은 한이 너무 많아 그런 것이라고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김덕령의병장이 입고 있던 옷이나 철릭, 직령(織領:두루마기의 일종) 등은 충장사 내 유물관에 그대로 보존·전시되고 있다. 김덕령의병장의 시신이 담겨있던 관곽도 그대로 놓여있다. 오랜 세월이 지났지만 처음 묻혀있던 곳의 토양성분에 회()가 많아 나무가 썩지 않은 탓에 상태가 매우 좋다.

 

이치에 있었던 김덕령의병장의 시신은 1974년 지금의 자리로 옮겨졌다. 김덕령의병장 가족의 묘는 순서가 좀 다르다. 좌측 묘군의 경우 맨 위에 김덕령의병장이 있고 고조부·고조모-아버지-형 덕홍 순이다. 우측으로는 증조부-조부-동생 덕보 순으로 묘들이 있다. 김덕령 의병장의 묘를 나중에 쓰다 보니 자리가 그렇게 된 듯싶다. 후손묘가 선산의 위쪽으로 올라가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그 경우에는 묘 방향을 약간 틀어서 자리를 잡으면 장례예법에 크게 어긋나지 않는다는 의견이 있다.

 

 

춘산곡(春山曲)과 취가정(醉歌亭)

 

김덕령의병장이 죽기 전 지었다는 시조(詩調)인〈춘산곡〉이 전해지고 있다.

‘춘산(春山)에 불이 나니 못다 핀 꽃 다 붙는다/저 뫼 저 불은 끌 물이나 있거니와/
이 몸의 내 없는 불이 나니 끌 물 없어 하노라’

 

 

이 불을 임금에 대한 충성의 마음인지. 아니면 어리석은 왕에 대한 분노와 원망의 마음으로 해석할 지는 독자들의 몫이다. 그렇지만 선조에게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김덕령의병장의 최후를 고려해볼 때 결과적으로 이 춘산곡은 원망가’(怨望歌)가 되고 있다. 또한 김덕령은 송강 정철의 제자인 권필의 꿈에 술에 취한 모습으로 나타나 취하여 부르는 노래 아무도 알아주는 이 없으나 내 마음 오직 긴 칼 들어 밝은 임금 받들기 소원이네라는 취시가(醉時歌)를 불렀다고 전해진다.

 

권필은 김덕령 의병장의 원혼(冤魂)을 달래주기 위해 지하에서 영령이 품었을 무한한 한이 한 곡조 취시가 속에 분명히 드러나네라며 화답시를 불렀다. 김덕령을 추모하기 위해 후손 김만식과 친족들이 충장공의 성장지에 지었다. 1890년 김덕령 후손들이 충효동 광주호 옆 성안마을 뒷동산 동쪽에 있는 정자를 짓고 취가정(醉歌亭)이라 이름 지었다. 취가정 이름은 취시가(醉時歌)에서 따온 것이다.

 

취가정은 6·25전쟁 당시 불에 타버렸으나 1955년에 다시 세워졌다. 정면 3, 측면 2칸에 기와를 얹은 팔작지붕 형태다. 거실 한 칸과 마루의 구조다. 정자 안쪽에는 설주 송문회가 취가정이라고 쓴 현판과 송근수의 취가정기, 김만신, 최수하 등의 시가 걸려 있다.

 

 

김덕령 의병장 추모사업과 충장공이 빠진 충장축제

 

충용문

 

 

 

해설사 신경희씨가 김덕령의병장과 충장사의 역사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광주향교 4개 단체장들이 주도적으로 김덕령의병장을 기리고 있다. 광주향교(전교 김남전) 유림 80여 명은 2019910일 무등산 자락의 충장사에서 충장공 김덕령 장군 제423주기 제향 행사를 올렸다. 이날 제향 행사는 약사보고, 분향, 헌작(헌관), 합동배례, 분향, 추모사, 묘소 참배 순으로 진행됐다. 김중채 유적보존회장(전 성균관광주광역시유도회본부 원임 회장)임진왜란 때 의병 5천명을 모집해 진해·고성 전투 등에서 고군분투하시고 젊은 나이에 옥사하신 충장공 김덕령 장군의 숭고한 호국충절의 정신을 후손들과 국민들이 잘 기렸으면 한다고 말했다.

 

충장공 김덕령은 임진·정유재란 당시 환란에 빠진 조선을 지킨 대표적인 의병장이다. 광주의 상징인 충장로는 그의 시호를 따온 것이다. 의향 광주를 대표할 만큼 김덕령의병장의 자취와 호국정신은 위대하다. 그렇지만 충장공을 기리고 그의 정신을 본받으려는 노력과 관심은 매우 낮다. 광주대표축제인 충장축제에서도 김덕령의병장과 관련된 행사가 별로 없을 정도다. 이에 김성식 조선이공대교수는 최근 한 신문에 게재한 칼럼을 통해서 이에 대한 시정을 촉구했다.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칼럼 전문을 소개한다.

 

무등산 전설로 내려오는 임진왜란 의병장 충장공 김덕령

 

지금 대한민국은 사계절 내내 각종 축제로 난장이 펼쳐지고 있다. 본래 축제란 역사성, 지역성, 그리고 이를 주도하는 민중성이 곁들여질 때 진정한 의미의 축제란 명칭을 사용할 수 있으며, 그렇지 않고 각종 놀이나 먹거리에 치중할 때는 그냥 잔치라 부르는 게 맞는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여러 사람을 청하여 먹고 즐기는 것이 잔치라는 사전적인 의미를 말하지 않더라도 몇몇 축제를 제외하고는 잔치란 표현을 쓰는 게 맞다. 그런 의미에서 흑산도 홍어축제광양 전어축제란 명칭보다는 흑산도 홍어잔치’, ‘광양 전어잔치란 표현이 적절하며, ‘함평 용천사 꽃무릇 큰 잔치란 명칭은 축제와 잔치를 구분할 줄 아는 이의 탁월한 선택이라고 할 수 있겠다.

 

문화체육관광부 선정 대한민국 최우수 축제를 표방하고 있는 이 지방 대표적 축제라 하는 충장축제만 하더라도 축제란 명칭을 거리낌 없이 사용해도 되는 것인지 다시 한 번 생각해보아야 하지 않을까 싶다. ‘충장이란 명칭을 쓰는 것만 해도 그렇다. ‘충장은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이었던 김덕령 장군의 시호에서 유래하였으며, 그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1946년부터 광주의 중심 도로 명으로 사용하고 있다.

 

충장축제란 명칭을 사용하기 위해선 충장공께 최소한의 예의라도 지키는 것이 도리가 아닌가 싶다. 올해로 16회째를 맞이하는 동안 충장공을 기리기 위한 행사는 단 한 번도 행해진 것이 없다는 것을 생각하면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올해의 충장축제도 뉴트로(새로움과 복고를 합친 신조어) 시대에 부응하는 세대 간 공감 콘텐츠를 확대하고 최근 대중문화를 반영하는 프로그램으로 무대에서의 향연만으로 진행된다면 시민들은 관중이 되어 그냥 볼거리에 만족해야만 할 것이다. 진정한 의미의 축제가 되기 위해서는 많은 시민이 자발적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충장공 김덕령 장군과 관련된 이벤트가 필요하다고 본다.

 

김덕령 장군에 대한 이야기는 역사적 사실뿐만 아니라 전설이 공존하고 있어 축제의 콘텐츠로 활용될 수 있는 면이 무척 많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축제의 기획자들은 전설이라는 게 한 지역을 중심으로 전승되기 때문에 애향심을 고취시키는데 큰 기능을 할 뿐만 아니라 지역민들의 호응과 축제의 변별성을 확보하는데도 효과가 크다는 사실을 적극 감안할 필요가 있다.

 

김덕령 장군에 대해서는 탄생에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많은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장군의 탄생에 관한 배재(梨峙)의 달걀 전설에 이어, 소년 시절에는 장사로서의 명성과 효자로서의 일화 또한 많이 전해지고 있다. 10여살 때에는 송강 정철과 함께 환벽당에서 공부하다 참새를 잡았던 이야기가 있는데, 몸을 솟구쳐 환벽당 지붕 위에 뛰어올라 한 손으로는 처마 끝을 잡고 한 손으로는 새집을 더듬어 참새를 잡아내는데 눈 깜작할 사이에 지붕을 다 돌았다는 이야기와 더불어, 효성 또한 지극해 노부모를 봉양하기 위해 매일 새벽 화순 남면까지 백 여리 길을 왕복하면서 살찐 물고기를 잡아 조석 반찬으로 봉양하였을 뿐만 아니라, 한 번은 어머니의 병환이 위급해지자 진주에 용한 의원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수백리 길을 하룻밤에 달려가서 약을 지어다가 회생케 했다고도 한다.

 

무등산과 관련된 전설도 많은데, 장차 국난이 닥칠 것을 예견하고 일찍부터 원효계곡 골짜기에 숨어서 칼과 창을 만들었다는 주검동(鑄劍洞) 전설, 금곡동에는 주검동에서 만든 칼을 시험해 본 바위로 두 쪽으로 갈라진 시검바위 전설, 지왕봉 바위와 바윗 사이를 뛰어다니며 무술을 연마하고 담력을 길렀다는 뜀바위 전설이 있다.

 

말바우 시장의 말바우도 장군의 전설과 관계가 있다. 장군이 용마를 타고 활을 쏴서 화살이 용마보다 먼저 가면 용마를 죽이기로 하였는데 화살을 쏘고 나서 용마를 몰아가서 보니 화살이 보이지 않자 말을 죽였는데 말을 죽이고 난 후 화살이 도착한 곳에 있던 바위로 말이 어찌나 힘껏 발굽을 내디뎠던지 바위에 말발굽 모양이 움푹 파였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이렇게 전해지는 많은 전설을 충장축제에 제대로 활용한다면 축제를 긍정화 하고 절대적인 필요성을 강화하는데 중심축으로 작용할 수 있다고 본다. 또한 충장축제의 뿌리를 온전히 되찾을 경우 광주시민에 대한 자부심을 느끼게 할 수 있는 계기가 될 뿐 아니라 우리의 후손들에 대한 문화적 공양도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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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움말

 

김세곤

정만진

김성식

신경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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