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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역사이야기 전라남도 누리집/남도의병

[전남역사이야기]남도의병 7 - 임진왜란 최초 의병장 월파 유팽로

by 바람재이야기 2024. 8. 25.

 

 

 

 

조선 최초 의병장 유팽로 선생과 곡성 합강마을

 

 

곡성 합강 마을의 사당과 말 무덤

 

전남 곡성의 합강마을은 옥과천과 섬진강이 만나는 곳이다. 그래서 두 강이 합해진다는 뜻에서 마을 이름이 합강(合江)이다. 강이 내려다보이는 합강마을 뒤쪽 야산 중턱에는 조그마한 사당이 있다이 사당의 주인공은 임진왜란 당시 조선 최초로 의병을 일으킨 분이다. 사당아래의 마을에는 이 사당의 주인공을 기리는 각종 벽화가 그려져 있다. 말위에 올라 늠름하게 의병을 지휘하는 그림이 있는 가하면, 절벽에서 스스로 몸을 던지는 여인의 모습도 있다.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는 말 무덤이 자리하고 있다. 이 말 무덤 역시 사당의 주인공과 깊은 관련이 있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했을 당시 전라도 옥과현(지금의 전남 곡성군 옥과면 합강리)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말무덤

 

사당의 주인공은 어떤 인물이었으며, 여인은 왜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까? 그리고, 사람들은 무슨 이유로 말 무덤을 세웠을까? 세월은 도도히 흘러가 잡을 길이 없지만 산천은 그 예전의 이야기를 모두 품고 있다. 곡성 합강마을에 담겨있는 역사의 향기를 맡아보자.

 

 

임진왜란의 시작

 

1592413일 왜병이 조선을 침략했다. 일본군은 20여만 명에 달했다. 고니시가 이끄는 일본군 선봉대 18700명은 700여 척의 전선에서 내려 부산포로 쳐들어왔다. 부산첨사 정발은 부산성을 지키다 전사했다. 부산성은 함락됐다. 그 다음날 동래성도 무너졌다. 418일에는 가토와 구로다의 후속부대가 각각 부산과 김해에 상륙했다.

 

일본군은 세 방향으로 나눠 한양을 향해 진격했다. 그러나 상주를 지키던 관군은 막강한 왜병의 적수가 아니었다. 관군은 속절없이 무너졌다. 신립장군 역시 충주 탄금대에 배수진을 치고 왜병과 싸웠으나 막아내지 못했다. 조총을 앞세운 일본군의 막강한 화력과 전투력에 관군은 도망가기에 바빴다. 결국 430일 새벽 선조와 세자 광해군은 평양으로 피난했다.

 

일본군은 부산 상륙 18일 만인 52일 한양을 점령했다. 경복궁과 민가들을 약탈한 뒤 모두 불살라 버렸다. 재물을 빼앗고 아녀자들을 능욕했다. 조선 산천은 일본군에 철저히 짓밟혔다. 관군은 임진강에서 일본군의 북상을 저지했으나 실패했다. 일본군은 27일부터 본격적으로 북상하기 시작했다.

 

평양에 머물던 선조는 611일 의주로 향했다. 614일 평양도 함락됐다. 일본군은 불과 2개월 만에 조선의 전국토를 장악했다. 그리고 무차별 살상과 약탈을 자행했다. 조선은 망하기 직전이었다. 명에 매달려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것이 유일한 방책이었다.

 

이때 벼랑 끝에 몰린 조선을 건져낸 이가 바다의 이순신 장군과 육지의 의병들이다. 이순신장군은 일본군의 침입에 대비해 1년 전부터 전선을 만들고, 수군을 훈련시키고, 군량을 비축해오고 있었다. 이순신 장군은 임진년 54일부터 6일 동안 옥포·합포·적진포 해전에서 왜군 전선 40여 척을 격파시켰다. 이순신 장군의 제해권 장악이 시작된 것이다.

 

최초의 의병장 유팽로 선생

 

 

육지에서도 의병들이 일어나 일본군과 싸우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의병을 모아 봉기한 이는 지금의 전남 곡성군 옥과면 합강리(당시 전라도 옥과현) 출신인 월파(月坡) 유팽로(柳彭老) 선생이다. 선생은 조선조 개국공신 유만수(柳曼殊)의 후손이다. 충주판관을 역임한 아버지 경안과 어머니 남원윤씨 사이에서 1554년 출생했다.

 

26세인 1579(선조 12)에 진사시에 들었고 1588(선조 21) 식년문과에 급제했다. 선생은 정 7품 홍문관 박사에 발탁되지만 이후 종 9품 성균관 학유로 좌천된다. 권력층의 비리를 비판했기 때문이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선생은 의병을 일으킬 것을 결심하고 한양을 떠나 고향 곡성으로 향했다.

 

도중에 선생은 어찌할 바를 모르며 모여 있는 백성들을 만나게 된다. 그들은 나라를 지키지 못한 임금과 벼슬아치들에 대해 분노하며 적대감을 드러냈다. 선생은 차분하게 그들을 설득했다. 위기에 빠진 이 나라를 힘을 합쳐 구해내자고 호소했다. 금방이라도 도적떼가 될 듯 행동했던 그들은 선생의 뜻을 받들어 의병으로 나섰다.

 

선생은 이들과 고향의 백성들, 그리고 가복들을 모아 500명의 군사를 만들어 일어섰다. 이때가 1592420일이었다. 선생은 순창 대동산 앞들에서 500여 명의 군사들과 함께 조선을 구할 것을 맹세했다. 선생은 전라도의병진동장군유팽로(全羅道義兵鎭東將軍柳彭老)’라 쓴 대청기(大靑旗)를 세우고 일본군과의 전투를 준비했다.

 

선생이 남긴 일기 <월파집>에는 당시의 상황이 이렇게 기록돼 있다.

#월파집

월파집/한국민족문화대백과

 

‘(임진년) 4월 20일, 순창 대동산에 이르니 500여명(기병 200, 보병 300)의 부랑배들이 있었다. 이들을 설득시켜 휘하 군사로 삼아, ‘전라도의병진동장군유팽로’라 쓴 청색기를 들고 21일 옥과로 왔다.’

 

 

鎭東(진동)동쪽을 진압한다는 것이니 동쪽의 왜구를 섬멸하겠다는 뜻이다. 유팽로 의병장의 봉기는 조선 최초의 의병장 봉기다. 임진왜란 최초의 의병부대인 것이다. 또한 선생이 의병 37명과 함께 임진년 511일 임실 갈담역(任實 曷潭驛)에서 왜병과 싸워 이긴 전투는 임진왜란사 중 최초의 의병 승전사이기도 하다.

 

현재 경남 의령시는 곽재우 홍의장군이 1592422일 의병을 일으킨 것을 기념해 지난 1972년부터 의병제전을 열고 있다. 그러나 조선 최초로 의병을 모아 나라를 지키기 위해 나선 인물은 곡성의 유팽로 의병장이다. 유팽로 의병장의 거병일자는 앞에서 밝힌 대로 1592420일이다.

 

유팽로 선생의 유고집인 <월파집>31책으로 구성돼 있다. 1권에는 시와 상소, 격문이 실려 있다. 2권은 유가설, 병가설, 농가설의 각종 설()등으로 이뤄져 있다. 그리고 3권은 159242일부터 유팽로 선생이 금산성전투에서 사망한 710일까지의 일기로 꾸려져 있다.

 

이중 농가설은(農家說)1580년 옥과 지역 농법을 정리한 지역농서이다. 한국 지역농서의 효시가 되고 있다. 지난 2004년 농촌진흥청이 번역해 펴낸 <고농서국역총서 7>에 실려 있다. 월파집에는 갈담역 전투가 이렇게 기록돼 있다.

 

‘(임진년)5월 11일, 의병을 이끌고 담양과 정읍을 거쳐 임실에 이르렀다. 임실 현감 이몽상과 연합하여 갈담역에서 적병 300명을 사살했다’

 

곽재우 장군이 의령(宜寧) 정진(鼎津)에서 왜병을 맞아 싸운 날은 임진년 526일이다. 유팽로 의병장의 임실전투가 511일이었으니 의령전투보다 15일 앞선다. 의병사에 있어서 호남의병의 의미가 두드러지는 부분이다. 고려 때부터 외세에 맞서 싸워온 호남인들의 충절과 기개가 임란 때도 여지없이 발휘된 것이다.

 

유월파정렬각

 

유팽로 의병장의 지략

 

전쟁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 중의 하나가 식량과 군수품이다. 유팽로 선생은 지역민들을 설득해 식량과 군복 등을 차질 없이 마련했다. 1천여 명에 달하는 의병들을 먹이고 무장시킨 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다. 그런데 선생은 이런 모든 일을 순조롭게 해결했다. 그의 뛰어난 인품과 헤아림이 없었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유팽로 선생은 지금의 광주와 장성, 담양, 정읍, 순창, 화순 등을 돌아다니며 지역의 명망가들과 함께 의병을 일으키는 문제를 논의했다. 유팽로 선생이 의병모집과 동맹을 위해 어떻게 활동했는지는 월파집에 다음과 같이 기록돼 있다.

 

(임진년)57, 화순의 최경회를 방문했으나 만나지 못했다. 그의 자제들과 의병모집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돌아오는 길에 무등산 석저촌에 들려 김덕령을 만났다. 김덕령이 모친이 노환으로 아프시기 때문에 의병 출정이 힘들다고 대답했다.

510, 장성 맥동의 변이중을 방문했다. 돌아오는 길에 장성군수를 만나 다시 의병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511, 의병을 이끌고 담양과 정읍을 거쳐 임실에 이르렀다. 임실 현감 이몽상과 연합해 갈담역에서 적병 300명을 사살했다.

515, 곡성 청계동 계곡에 들려 이종 형 양대박과 출병을 의논했다. 그 뒤 광주의 고경명에게 의병 창기의 편지를 보냈다.

65, 김덕령이 마침내 합류했다.

68, 고경명을 의병대장으로 추대했다. 좌부장(左副將)은 유팽로, 우부장(右副將)은 양대박, 종사관은 안영으로 꾸렸다.

610, 영광에서 강항이 군량 10석을 보내왔다. 11일 마침내 호남좌도 6천 의병은 당당히 출정했다.

614, 임실 현감이 군량 1천석을 보내왔으며 의병 추가 모집을 위해 양대박과 고경명의 둘째 아들 고인후가 남원에 갔다.

628, 왜병이 금산 점령 후 전주를 침공한다는 정보를 획득했다. 전주를 사수하기로 결정했다.

629, 은진으로 향하던 중 임실 운암 장곡에서 양대박이 대승을 거두었다는 기쁜 소식을 들었다.

77, 전투에 앞서 진을 개편했다. 선봉에 유팽로, 중군에 고경명, 후군에 안영, 본진에 고종후가 서기로 했다. 영규 스님이 수백 명의 승군을 이끌고 왔다.

78, 의병군이 금산 와평들에 이르렀다.

 

위 기록대로 유팽로 선생은 안영, 양대박과 함께 담양에 모여 고경명을 총대장으로 추대했다. 양대박 장군은 유팽로와 이종사촌으로 당시 남원에서 살고 있었다. 안영은 남원의 의병장이었다.

임진왜란 당시의 일본군은 조총을 보유한 막강한 전력의 군대였다. 병사들 대부분은 수많은 내전을 거치면서 전투에 매우 능숙했다. 수가 많고 싸움에 능한 일본군을 상대로 한 전투는 승산이 없었다. 따라서 매복과 기습 등 유격전이 최선의 전술이었다. 의병들은 지리를 잘 알고 있었기에 불시에 적을 타격한 뒤 산으로 숨으면 큰 피해를 입지 않을 수 있었다.

 

유팽로 의병장은 요새를 나누어 대비한 뒤 적이 방심해지기를 기다려 정예병을 선발해 공격하자는 의견을 내놓았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만약 고경명 의병군이 선생의 유격전술을 받아들여 장기전으로 나섰다면 호남의병은 더 오랫동안 일본군을 괴롭혔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고경명의병장의 무리한 금산성 공격으로 호남의병 6천명은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금산성 전투 이후 1천여 명 이상의 의병 거병은 사실상 사라지게 된다.

도산사

 

일본군의 전라도 진격과 웅치·이치전투

 

일본군은 곡창지대인 호남을 점령하려 했다. 일본군은 호남을 차지해 부족한 군량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도요토미는 제6군 고바야카와 다카카게(小早川隆景)에게 전라도의 중심인 전주성을 점령하라고 지시했다. 한양에 있던 고바야카와는 창원에 주둔하고 있던 별군 2천여명을 의령을 거쳐 산청-함양-남원-전주로 보내려 했다.

 

그러나 왜 별군은 의령에서 홍의장군 곽재우에게 패하고 만다. 이에 고바야카와는 자신이 직접 부대를 이끌고 서울에서 전라도로 내려와 전라도 점령 작전을 지휘했다. 서울에서 내려온 고바야카와는 영동-무주를 거쳐 1592623, 금산성을 함락시켰다.

 

그런 다음에 금산성에 제6군 군사령부를 설치하고 22천여 명의 부대를 본대와 제1,2대 등 셋으로 나눴다. 고바야카와는 본대 1만여 명을 금산성에 남아 배후를 지키도록 했다. 그리고 1만여 명의 병력을 제1대에 배치해 금산-무주-진안-전주 방향으로 공격토록 했다. 또 자신은 2천여 명을 이끌고 금산-진산-전주로 진격했다.

 

그런데 금산에서 전주로 가려면 웅치와 이치라는 두 고갯길을 넘어야 했다. 조선관군과 의병은 이 두 곳을 지키기로 했다. 두 곳의 고갯길 양쪽에 군사를 매복해 일본군을 기습 공격한다는 작전을 세웠다. 웅치는 김제 군수 정담과 의병장 황박, 나주 판관 이복남이 군사를 이끌고 지키기로 했다.

 

이치는 임시 도절제사 권율과 동복현감 황진이 방어키로 했다. 조선군과 의병은 이 두 고개에서 일본군을 막은 뒤 만약 실패하면 전주성으로 모여 2차 방어에 들어간다는 계획을 세웠다. 그런 다음 담양에서 북상 중이던 의병장 고경명에게 군사를 이끌고 금산성을 공격하도록 했다.

 

금산성을 빼앗으면 일본군은 근거지가 없어지게 된다. 양쪽에서 협공을 펼쳐 일본군을 전멸시킨다는 전략이었다. 이런 사실을 알 리 없는 일본군은 159277일 웅치의 조선군을 공격했다. 일본군 제1대가 웅치골짜기로 몰려들었다. 조선군은 전력을 다해 싸웠다. 첫날 싸움에서는 기를 쓰고 일본군을 막아냈으나 이튿날 방어선이 무너지고 말았다. 김제 군수 정담은 후퇴권유를 물리치고 끝까지 싸우다 전사했다. 나머지 병력은 전주성으로 후퇴했다.

 

78일 이치에서도 혈전이 벌어졌다. 권율과 황진은 군사들을 독려하며 일본군 제2대와 싸웠다. 일본군은 병력도 많았고 조총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전황은 조선군에게 불리해졌다. 그런데 갑자기 일본군들이 후퇴하기 시작했다. 같은 시간 전주성 앞까지 몰려왔던 일본군 제1대도 갑자기 철수했다.

 

금산성 본대에서 고경명, 유팽로 의병장들이 지휘하는 의병 7천여 명이 금산성을 공격하기 위해 진격해오고 있다는 보고를 해왔기 때문이다. 고바야카와는 전주성을 함락시키는 것보다는 금산성을 지키는 것이 급선무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전주성 공격과 이치함락을 눈앞에 두고도 군사를 돌려 금산성으로 후퇴해 수성작전에 들어간 것이다.

 

한편 금산성을 구하기 위해 경상도에 있던 일본군 제6군 소속 병력 1500여명이 전라도 진입을 시도했다. 그러나 이들 일본군은 경상도 거창의 우석현에 매복해 있던 의병장 김면의 공격을 받아 철수하고 만다. 조선관군과 의병들의 금산성 공격은 일본군의 전력을 약화시키는데 큰 역할을 한 것이다.

 

금산전투와 유팽로 선생의 순절

 

유팽로선생의 묘
정렬각
정렬각에서 바라본 합강마을

 

61일 담양에서 출병한 고경명과 유팽로 의병장 등 호남의병의 수는 6700여명에 달했다. 이는 당시 의병부대 중 단일부대로는 가장 큰 부대였다. 당초 고경명 의병군은 한양까지 진격할 계획이었다. 그런데 일본군이 금산을 넘어 전주를 공격하려 한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계획을 바꿔 금산으로 향했다. 전라도를 지키기 위해서였다.

 

159279, 고경명·유팽로 등 의병군은 전라도 방어사 곽영의 관군과 함께 금산성을 에워싸고 공격준비를 했다. 이때 일본군은 금산성문을 굳게 닫고 수비에 치중했다. 가끔 성문을 나와 조선관군을 공격하면서 약점을 살피고 돌아가고는 했다. 조선관군과 의병은 30명의 결사대를 보내 비격진천뢰 등으로 성벽을 폭파하려 했으나 여의치가 않았다.

 

이때 곽영은 전주성을 공격하던 일본군이 금산성으로 회군한다는 소식을 듣고 후퇴하자고 말했다. 그러나 고경명의병장은 공격을 주장했다. 수적으로 더 많은 부대를 거느린 고경명의병장의 뜻에 따라 조선관군과 의병들은 10일 새벽 다시 금산성 공격에 나섰다. 일본군은 성위에서 조총을 쏘며 방어에 치중했다.

 

그런데 갑자기 일본군이 성문을 열고 관군 진영으로 쳐들어왔다. 일본군은 수도 적고 전력도 약한 관군을 집중 공격해 의병군 진영을 무너뜨리는 전술을 사용한 것이다. 관군이 무너지자 의병들의 사기가 급속히 떨어졌다. 전열이 붕괴됐다. 이에 많은 의병장들이 후퇴를 건의했으나 고경명은 패전장수로서 죽음이 있을 뿐이다며 물러서지를 않았다.

 

이때 유팽로 선생은 적의 파상공격에 의병들을 이끌고 잠시 후퇴했으나 고경명 의병장이 적진에 남아있다는 말에 말머리를 돌려 적진으로 돌진해갔다. 그리고 고경명 의병장을 구하기 위해 분전하다가 일본군의 칼에 맞아 장렬하게 전사했다. 이 전투에서 고경명과 그의 둘째 아들 고인후, 유팽로·안영 등의 의병장들이 의로운 죽음을 맞았다.

 

장남 고종후는 금산성 전투에서 가까스로 살아남아 아버지와 동생의 시신을 수습해 후퇴했다. 그러나 고종후 역시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일본군과 싸우다 끝까지 전사한다. 광주광역시 남구에는 고경명과 두 아들, 조카, 함께 전사한 노비 등을 기리는 사당인 포충사가 있다. 광주역에서 남광주역을 잇는 도로인 제봉로는 고경명의 호를 따서 이름 지은 것이다.

 

금산성 전투 후 40여일이 지난 818, 의병장 조헌이 이끄는 700여 의병들과 승려 영규가 이끄는 600 여명의 승군들이 금산성을 다시 공격한다. 그러나 이들은 전원 전멸한다. 이 전투에서 조헌과 그의 아들 조완기, 영규스님이 전사한다.

일본군 제6군은 막대한 희생을 치르고 금산성을 지켰으나 결국 버티지 못하고 917, 경상도 성주 방면으로 퇴각한다. 6군의 퇴각으로 일본군의 전라도 진입은 결국 실패한다. 고경명·유팽로·조헌 의병장과 의병, 관군들의 고결한 희생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금산전투와 유팽로 선생의 순절

 

원주 김씨는 유팽로 선생의 부인이다. 의병을 이끌고 싸움터로 나가기 전 유팽로 선생은 부모의 묘소에 참배한 뒤 아우를 불러 가문을 이어줄 것을 당부했다고 한다. 유팽로 선생과 원주 김씨 사이에는 후손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때 아내 원주 김씨는 군자가 나라를 위할 때 어찌 사사로운 집 안 일을 말씀하십니까?”라며 남편의 마음을 담대하게 해주었다고 전해진다.

 

유팽로선생이 타고 다니던 오리마. 합강마을 사당아래에 있는 벽화
유팽로선생의 아내 원주 김씨. 합강마을 사당아래에 있는 벽화

 

원주 김씨는 남편이 일본군과 싸우러 간 뒤 날마다 지성으로 남편의 무사함과 조선의병의 승리를 기원했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원주 김씨는 말 한 마리가 방문 앞에 다가와 우는소리를 들었다. 서둘러 나가보니 말의 입에는 남편의 머리가 물려 있었다. 유팽로 선생이 타고 다니던 오리마가 선생의 머리를 가지고 집까지 찾아온 것이었다.

 

원주 김씨는 치마로 남편의 머리를 받아 장사를 지냈다. 그리고 스스로 남편의 뒤를 따라 간 것으로 전해진다. 합강마을 입구의 벽화들은 유팽로 의병장의 거병과 출정, 그리고 전투를 묘사한 것인데, 그중 한 여인이 절벽에서 뛰어내리고 있는 벽화는 원주 김씨를 의미한다.

 

후손들은 유팽로 의병장을 기리기 위해 정렬각과 도산사를 세웠다. 그리고 주인의 몸을 끝까지 챙겨 수백 리를 달려온 오리마의 갸륵한 마음을 장하게 여겨 의마총을 만들었다. 유팽로 의병장은 도산사 뿐만 아니라 광주 포충사와 충남 금산 종용당, 곡성 겸면의 영귀서원, 옥산사 등에 배향돼 있다.